해가 바뀌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방황이다.
익숙한 것이 점점 낯설어지고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 익숙해진다.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것이 더 명확해질 줄 알았다.
더 선명해지고 그래서 더 편안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더 모호해진다.
2,30년 전에는 오히려 더 확신이 있었다.
그건 아니지.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가 '그럴 수도 있겠다.'로 바뀌어간다.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지는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데 남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너무도 단순하고 선명한 문제인데 남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지? 왜??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날린 말들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아프게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말이다..
너도 내 나이 돼 봐
이 말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나이 먹는다는 것은 정말 되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깨끗한 죽음.
건강 따위... 죽음이 오면 깨끗하게 맞아 주지 뭐.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어찌 변할지 모르는 것이 무섭다.
토지에 나오는 임이네처럼 비둘기 잡아먹고 살고자 발버둥 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예전에 명확했던 것이 점점 모호해지니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다.
나이 먹고 아프면 다른 이에게 짐이 되지 말고 시설로 가야 한다는 것.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런데 진짜 그런 상황이 오면 가고 싶지 않다고.. 가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ㅠㅠ
이럴 수가. 칼같이 아니면 아니었는데 지금은...
예전에는 남들이 하는 좋은(?)말들이 그저 입에 발린 말, 위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말들이 진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모호하게 변해가는 나 자신 때문에 자꾸만 자기 검열에 들어간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옛날 확신에 차서 내뱉은 말들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은 그런 말들이 부끄럽다.
나와 관계 맺었던 많은 사람들. 친구들 직장 동료들....'난 안 그래.' 이런 말들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쿨하고 담백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지 못한 것이 나 자신이었다.
노력했다는 것이 그것의 반증이다.
괜찮아. 라고 말하지만 저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그랬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머리가 시키는 대로 내가 만들어 놓은 전형으로 살았다.
두렵고 예민하고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내 자신을 무시했다.
직장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다.
92년 발령받아서 만 20년을 채웠으니 2012년 여름 퇴직했다.
항상 내가 언제 퇴직했는지 연도가 기억나지 않았다.
간청재를 언제 완성했는지도 연도가 헷갈렸다.
그즈음에 일이 많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학교도 옮겼고 휴직도 했으며 복직과 동시에 퇴직을 했고 간청재를 짓기 시작했고...
그래서 항상 연도가 기억나지 않고 그때의 장면만 그림처럼 떠올랐다.
차분히 생각하자.
내가 발령받은 것은 대학 졸업과 동시였으니, 그것은 확실하니 20년을 더해서 퇴직 연도를 확실히 기억하려고 한다.
그리고 2013년에 간청재를 얻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해도 자꾸 헷갈린다.
그냥 장면만 떠오른다. 몇 년에 어떤 학교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숫자는 정말... 숫자가 안 되면 정말 멍청하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나는 숫자를 싫어하고 수 개념이 약한(거의 없음)것이 뭐 그럴 수도 있지... 했는데 기억력에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 들면서 점점 흐리멍덩해지는데 이를 어째..ㅠㅠ
의도적으로 숫자를 기억하려고 92년 20년 그렇게 퇴직한 해를 기억하려고 한다.
아빠가 돌아가신 해도 확실하게 기억하자. 2008년. 다음 해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20016년 내 반평생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간청재로 이사했다.
92년, 2008년, 2012년, 2013년, 2016년. 그리고 2022년 연관스님.
내 인생에서 중요한 숫자들이다.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키우고 살 때에는 이런저런 조건만 충족되면 모든 것이 편안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조건이 거의 충족되는 퇴직과 도시를 떠나는 삶을 살고 있는데도 그렇지가 않다.
가장 중요한 문제, 나 자신의 문제를 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장, 아이, 가족, 사는 곳 이런 것이 다는 아니다.
그런데 그것에 파묻혀서 나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느끼는지...
서울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 자락으로 오면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들떠서, 서울을 떠나 산자락에 작은 집을 짓고 돈벌이도 하지 않고 사는 것에 들뜨고 신나서
처음 몇 년은 마구 나대면서 살았다. 그때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모든 것이 차분해지면서 내가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보이는 내가, 내가 알던 익숙한 내 모습이 아닌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그래서 그 모호함이 계속되고 답답하고...
찬찬히 나를 보면서 나와 관계 맺는 것에 대해 다시 보이고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공감하고 나눌 곳은 없다. 다들 잘 지내고 별일 없는 것 같고 별 혼란스러움도 없는 것 같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가사 그대로다.
그래서 조금씩 쓰려고 한다. 불쑥불쑥 두서없이 말이다.
아빠와 연관스님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로 마무리하셨다.
나는 어떻게 될까..
예전 같으면 이렇게 할 것이라 선명하게 말하겠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예전의 선명함이나 쿨한(?) 태도는 나의 불안을 막아내는 위선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단순하고 차갑게 살아갈 수 있어.
그렇게 사회의 관계에서 막아왔던 것이 일순간에 없어지니 낯설지만 익숙한 내가 저 구석에서 나오는 것이다.
불안하고 모호하고 자기 검열에 빠져버린 내가 말이다.
그리고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기대고 징징대고 싶다는 생각...
인생 총량의 법칙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