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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굴뚝새 2013/09/09

by jebi1009 2018. 12. 25.


       


날씨가 좋다. 선선하고 아침 저녁으로는 이제 '춥다'는 말도 나온다.
무엇보다 침대에서 책 읽다가 잠드는 것도 할 수 있고...
이번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책도 잘 못 읽었었다.
근데 이제는 정말 낮이건 밤이건 책 읽기가 너무 좋다...신나라..
백수의 특권 중 하나가 뒹굴대면서 책읽기가 아닌가.
지난번 만났던 선배가 꼭 읽어보라며 '조개줍는 아이들'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사실 나는 그런 종류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아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날씨도 좋고 뒹굴대며 읽기에 괜찮을 것 같아
나름 즐기며 읽었다.
소설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번역물은 더더욱...
꽤 오랫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던 것 같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됐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번역물의 묘사들...(사실 별로 와 닿지 않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다.)
집, 정원, 동네, 사람들의 차림새 등등의 긴 묘사들...
서양의 동네와 집들이 익숙하지 않으니 그리 잘 그려지지는 않지만 나름 살살 그려보면서 나갔다.
책의 내용이야 책 표지에 선전한 <부부와 연인, 모녀와 자매가 함께 읽어야 할 감동의 휴먼 스토리>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 책 읽는 기분은 냈다.
갑자기 그 분위기에 필이 꽂혀 옛날 책들을 뒤지며
비밀의 화원,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까지 다시 읽었다.
옛날 책, 그래야 8,90년대  (내 생각에는 90년대는 옛날도 아닌 것 같지만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90년대를 묘사할 때는 내가 느끼는 70년대 같이 그린다.)에 출판된 것인데 왜이리 활자가 작고 빽빽하지..눈이 다 어른거렸다.
그 책들을 뒤지다 공책 한 권이 나왔다.
대학 때 들었던 전공 과목의 공책이었다.
'현대시 선독'이라는 과목이었는데 그 과제물 공책이었다.
현대시 100편(50편인가? 기억이 가물가물)을 선정해서 그 시에 대해 문제를 하나씩 만들어 그 문제에 답하는 숙제.
< 현대시의 이해>라는 교재가 있었으므로 그 교재에서 대부분 시를 선택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답변의 분량은 한페이지 이상이었다.
말이 쉬워 질문이지 그냥 시 한 편당 분석이나 감상문을 한 페이지 넘게 쓰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제출 기한도 그리 길지 않았다. 다들 시작은 했지만 도저히 그 분량을 채울 수 없었다.
나도 다시 보니 45편으로 끝나 있네...
처음에는 다 그럴 듯한, 한 편의 논문 제목 같은 질문과 그 답변 내용도 나름 심도(?) 있었다.
그러나 점점 뒤로 갈수록 요령이 눈에 들어온다.
< 우리나라 꽃들에겐 -김명수->
문제] 이 시에 등장하는 꽃, 나무에 대해서 조사해 보자.
그러고는 쥐똥나무, 지렁쿠나무, 똘배나무..등등을 백과사전에서 찾아 옮겨 놓았다.

그리고 가장 압권은...
< 굴뚝새 -이명자->
문제] 굴뚝새에 관해 알아보자.
그러고는 연필로 백과사전 보고 그렸다. ㅎㅎ
당시에는 컴퓨터 인터넷도 없고 사진은 그리거나 어디서 오려 붙이기가 전부였다. 숙제도 다 손으로 쓰고...
그때 전동식 타자기, 워드로 숙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집에 없는 경우에는 한장 당 얼마씩 내고 복사가계에 맡겼다.
현대시 담당 교수는 항상 집에 있는 텔레비전 팔아서 워드나 타자기 사라고 했었다.
그래서 나도 그때 거금을 들여 '현대 워드피아'라는 다섯줄만 액정 화면에 나오는 워드를 사기도 했다.
난 글씨를 너무 못 써서 시험 볼 때나 숙제를 제출할 때 불리한 점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학교 근무할 때 그때는 생활기록부를 손으로 썼는데
'아니 이걸 애들 시켜서 썼어요?'하는 억울한 타박을 듣기도 했었다.
그때 워드 인쇄는 인쇄 테잎을 사서 끼우거나 감광지를 사서 해야 했는데 감광지는 시간이 지나면
글자가 사라져버리는 단점이 있어 항상 테잎을 여러개 사 두어야 했다. 얼마나 헤픈지....
잠깐 딴길로 샜네...

난 이 과목에서 당당히 에이뿔을 받았다. 자랑질~
일단, 이 정도의 분량을 채운 사람이 없었으며 또 의외로 이 굴뚝새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
문학의 가장 큰 이해와 감동은 자신의 경험과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
그 교수는 덧붙이며 대학원 지난 기말고사에 매미를 그리는 문제를 냈다고 했다.
그 학기에 매미가 등장하는 작품을 했나보다...근데 매미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단다.
지금이야 좀 달라졌지만 그 당시 대학 1, 2학년 때는 그냥 다 아는 것 처럼 혼자 잘난척 하고 지나가는 것이
오죽이나 많았던가....이 나무나 저 나무나 다 비슷비슷, 이 꽃이나 저 꽃이나...동백꽃은 붉은색이지 뭐...
물론 그래도 나름 감동 받고 확 꽂히고 그랬다.
그래도 그게 직접 본 거랑 혼자 그려본 거랑 어디 같겠는가...

나는 무식한 사람 중에도 정말 무식했다. 지금도 그렇고...
아기 손을 보고 왜 고사리손이라 하는지 그냥 그런가부다 했었다.
고사리 끝부분이 그렇다는데 고사리나물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도통 아기 손 같지는 않았다.
난 얼마전까지도 고사리가 갈색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밭에 있는 고사리를 보니 연두색이었고
올라오는 고사리를 보니 정말 오무려 쥐고 있는 아기손 같았다.


동백꽃 떨어진 것을 직접 보지 않고
'꽃이 피는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 이더군 ' 이렇게 말할 수는 없고
송화가루 날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는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가 있는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의 분위기를 말 할 수 없고
노루꼬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않고는
'갱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해 줄수는 없는 것이다.

염전의 소금은 왜 소금이 '온다'고 말하는 것이며
콩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을 직접 보면 정말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뜬금 없는 결론.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겸손하게 살아야겠다.

p.s
굴뚝새   -이명자-
굴뚝새 한 마리
자나 깨나 꺼진 불도 보지 않고
굴뚝의 씨만 뿌리고 있다.
굴뚝새는 밤낮으로 무성한 굴뚝을
뿌린 대로 거두고 있으나
그 피를 연명할 길 없어
암표처럼 굴뚝을 하나씩
꽃들에게 팔아버린다.
혁명처럼, 폭파범의 심장처럼
굴뚝은 더욱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불도 연기도 열심히 피어오른다.
굴뚝새의 피도 막힘없이
잘 피어오른다, 다행이다.
굴뚝을 꽃들에게 팔기 만 번 잘했다.
굴둑새가 어찌 불을 떼지 못하면서
굴뚝만 기르겠는가.
꽃이 어찌 굴뚝도 없이
불만 피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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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ippy 2013/09/09 20:54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도 번역이 되어 있군요. 이 책이 영어권 아이들에겐 필수적으로 읽히는 동화라는 걸 여기 와서 알았어요. '크리스마스 캐롤'과 더불어서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릴 때 기억나는 이야기중 하나랍니다.

    • 제비 2013/09/17 16:12

      옛날 집에 있던 소년소녀 세계명작동화 50권짜리 주황색 전집이 생각나네요.
      항상 그 전집을 보면서 왜 소녀소년이라고 안 할까..했었는데 ㅎㅎ

  2. huiya 2013/09/10 21:15

    책읽기 좋은, 산책하기도 좋은 맛있는 먹을것이 많이 나오는 계절이지요...

    • 제비 2013/09/17 16:13

      맞아요..맛있는 밤, 감, 고구마...

  3. 알퐁 2013/09/11 08:45

    글씨는 글과 많이 다르네요? 조신? 아 잼나다!

    • 제비 2013/09/17 16:13

      설마 저 글씨가 조신하다는 뜻? 아니겠죠?

    • 알퐁 2013/09/25 20:09

      네 글씨가 조신해요.
      아닌가요?
      제 눈에는 천천히 또박또박 쓴 조신한 글씨로 보이는데요???

    • 제비 2013/09/25 20:22

      분량 채우려고 띄어쓰기를 널찍하게 해서 그래 보여도 잘 보면 참 균형감각 없는 글씨.
      그래도 저것은 제출하려고 또박또박 썼으니 망정이지 평소 제 글씨를 보면...

  4. 너도바람 2013/09/11 11:24

    세상에, 어떤 인간이 애들 시켜 생활기록부 쓴거야? 나라도 그렇게 말했을걸...

    • 제비 2013/09/17 16:16

      손으로 글씨를 쓰지 않아도 될만큼 편리해졌지만 여전히 손글씨가 필요한 곳이 꼭 있더라구요..여전히 글씨 못 쓰는 서러움을 한 몸에 흑흑...

  5. 美의 女神 2013/09/11 15:53

    손글씨로 시도 많이 베껴쓰곤 했지요. 그땐...그림도 그리고.
    중1때 인쇄소를 하던 집 딸래미가 아트지에다 차트 글씨를 어찌나 잘 쓰던지.
    반전체가 글씨의 변형을 했지요. 지금 제 글씨도 그때 형성되었다는...

    • 제비 2013/09/17 16:19

      중1때 담샘이 엄청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환경미화에 1등하려고 글씨쓰는 사람 돈 주고 불러와서 환경미화 하고 그랬어요...덕분에 우리는 암 것도 안해서 편했지만..아니구나 청소를 정말 쌔빠지게 했다.

  6. 나무 2013/09/25 10:14

    구들방 아궁이.
    얼마만에 보는 건지...

    • 제비 2013/09/25 20:22

      완성되면 와서 지지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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