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된 일인지 10월 달이 될 무렵부터 아파트에서 국기를 공짜로 나눠주고는
1일부터 9일까지 태극기를 달라고 야단이다.
길거리에는 국기를 달고 애국심에 불타자는 현수막도 나붙고...
갑자기 쌩뚱맞게 국기타령은...
이러다 국기 하강식 한다고 길 가다가 멈춰서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시절이 다시 올 것 같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나는 한글 만큼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입이 떡 벌어지도록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글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잘난척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정말 고급스럽고 과학적인 문자다...사치스러울 정도다..쓸수록 알수록 감탄이 절로 난다.
공휴일이 된 기념(?)으로 일을 두 개나 치르고 나니 피곤해서 온 몸이 파김치다.
하루종일 입맛 없어 굶다가 저녁에 와인 한 병 까고 잤다.
점심은 시어머니 생신모임, 저녁은 우리 딸내미 생일..
딸내미랑 저녁 먹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점심 때의 여파가 너무 커서 집 앞에 있는 빕스까지 걸어가기도 벅찼다.
가족은....정말 힘들다.
공유할 수 있는 생각이나 근본적인 가치관이 다르다면
같은 유전자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틀을 유지해야만 할까...
또 같은 유전자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며 더 함부로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쉽게 깨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틀이다.
이제 완벽하게 나는 우리집에서, 용가리는 용가리집에서 공식적인 왕따가 되었다.
나와 그들로 확연하게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용가리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 생각을 강요하거나 설득할 수는 없지만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동할 것이다.
17년 전 나는 병원에 있었다.
딸을 낳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술을 해서 데리고 나왔다.
난 척추마취를 했기 때문에 의식이 있었다.
아이가 나왔고 간호사가 안겨주며 뽀뽀하라고 했다.
나는 아이가 나오고 대충 닦여지고 내 옆에 오는 것도 모두 보았다. 그리고 볼에 뽀뽀했다.
회복실로 옮겨졌다.
회복실에는 수술을 끝낸 환자들이 누워있었다.
회복실 침대로 옮겨지자 나는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물이 흘러 귓볼을 적셨다.
그렇게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우는 것이 창피해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울음은 멈출 수가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슬펐다. 너무나도 슬펐다. 슬픔의 큰 덩어리가 저 밑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끅끅거리며 슬픔의 덩어리를 계속 토해내고 있으니 간호사가 다가와서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수술이 많이 힘드셨나봐요....
그리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나가서 보호자를 찾아왔다.
회복실에는 보호자 면회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들어왔고 그리고 용가리도 들어왔다.
그리고 어떻게 눈물이 수습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때의 회복실에서 눈물 흘릴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찔끔거려진다는 것이다.
내가 온 몸으로 슬픔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난 아이를 낳고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하는 모습을 보면
죄책감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나에게는 모성애가 없는 것인가.....
아이가 밉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예뻤고 신기했다. 그런데 슬펐다.
그렇게 그렇게 아이는 자라서 지금 우리들의 일부가 되었다.
난 아이가 너무 좋아 죽겠다거나 예뻐 죽겠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다만 아이가 없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가 우리에게 와 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인연으로 내게 와 준 것이다.
아이는 우리가 탄생시킨 것도 아니고 우리의 소유물도 아니다.
우리가 원했으니 우리에게 와 준 것 뿐이다.
사실 정말 원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때는 결혼을 하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것은 내 선택가지에 들어 있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에게 와 준 인연을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보살펴줄 뿐이다.
가끔 어렸을 때 엄마가 혼을 내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렇게 말을 안 들어...' 하시면,
'누가 낳아달라고 했나? 엄마가 낳은거잖아..그랬으면 키워주는게 당연한 것 아니야?'
이렇게 열받아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다.
내가 원해서 나에게 와 준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펼칠 수 있도록 그때까지 잠시 보호해 주는 것 뿐이다.
스스로 힘을 기를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나에게 오라고 해 놓고는 책임 없이 나도 모르겠다고 알몸뚱이로 내쳐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때가 언제인지는 사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지금 나는 20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가 우리의 보살핌을 잘 받아서 세상으로 나가 또 다른 인연을 만들고 자신의 인생을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
내 옆에 있지 않아도, 얼굴을 자주 보여주지 않아도 좋다.
가끔 아주 가끔 어디선가 잘 지낸다고 엽서 한 장이면 족하다.
자식 키우는 것을 일종의 투자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너한테 들인 돈이 얼마인데...내가 예술학교 선생으로 있으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정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식에게 쏟아붓고 빈털털이가 되어 자식이 자신을 쳐다봐 주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자식을 키운 댓가로 부모보필을 원한다면 자식을 키울 것이 아니라 보험에 드는 편이 낫다.
나에게 와 준 작고 연약한 아이를 힘을 키워 세상으로 보내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그 이후에는 관계가 좋다면 좋은 사이로 남을 것이고 아니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식과의 관계도 결국은 부모가 만든 것이니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생명의 시작과 마무리에 생각이 머문다.
우리아빠의 죽음, 남겨진 엄마의 모습, 치매를 앓고 계신 시아버지, 그 시아버지를 돌보시는 아픈 시어머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고 마무리지어야한다는 생각이다.
나 스스로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마음을 단련시키고 욕심을 버리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탓하지 않기...
마음이 산란하다...주문을 외워보자
두려워 마라 별 것 아니다
top
huiya 2014/10/10 23:25
어쩌면 가족이라는 관계가 가장 어려운 관계일지도 몰라요...
어떤 인연으로 가족이라는 관계가 맺어졌는지 모르지만요.
제비 2014/10/16 18:27
맞아요. 어려운 관계...
美의 女神 2014/10/14 12:53
갈수록 가족보다는 식구위주로 아니 나 위주로 사는거죠.
의무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야 하는데 아직도 못 그러고 사네요.
제비 2014/10/16 18:31
의무감이 없어져야 즐거움이 올 수 있을텐데 말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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