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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풍농월

뒷담화 2013/09/02

by jebi1009 2018. 12. 25.


  아침 수월암 마당에서 세수하다가 잠시 넋 놓게 만든 아이

지난주 토요일 상량식을 하면서 생각했다.
난 전생에 무슨 착한 일을 해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일까....
좋은 사람들, 좋은 이야기, 좋은 기운, 좋은 바람, 좋은 풍광...
이 덜 떨어지고 띨띨한 부부를 위해 함께 동행해 주고 함께 막걸리 잔을 부딪혀 준 모든 분들이 정말 고맙다.
하안거 끝내시고 다시 돌아오신 스님 덕분에 우리는 형님 모신 똘마니의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 두어번 내려갔지만 끈 떨어진 연이 되어 두 어깨에 힘이 빠져 재미가 없던 것이
이제 큰형님 밑의 똘마니들 마냥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원래 형님은 가만히 계시는데 밑에 있는 것들이 더 힘주는 것 아닌가 ㅎㅎㅎ
그날 처음 뵙게 된 강원도에서 오신 스님은 풍수지리에 아주 해박하신 도사스님이라 하셨는데
우리집 지세가 아주 좋다고 연신 감탄하셨다.
이 곳에서는 자손이 다 잘되고 아들이 외교관(?)이 된다고...
아이고 우리는 아들이 없는디...하니까 하나 낳으라고 하신다 ㅎㅎ
딸이건 아들이건 다 잘 되고 복이 가득 들 거라 하시니 기분 좋아 막걸리가 술술 잘 넘어간다.
특히 우리집에서 아주 작은 구들방이 가장 좋은 곳이라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야 물 건너갔지만 아직 자식 생산에 미련이 있는 분들은 기꺼이 그 방을 내어 드리리...
반드시 우리 딸내미는 첫날밤을 그 곳에서 보내게 해야겠다 ㅋㅋ
역사에 보면 친정집 기운을 받으러 해산날이 임박해 방을 차지하고 나오지 않았던 여인네들이 있지 않던가..
신사임당도 그랬고..
야속하게 친정집에서도 출가한 딸에게 그 기운을 빼앗기지 않으려 그 방을 내놓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알아서 자리 마려해 놓으리라..
얼마 안 있어 사위 며느리 보게 되시는 분들 우리집 구들방 이용 가능합니다 ㅎㅎ

나는 가사입으신 스님 모습을 처음 뵈어 사진이라도 남기려 했건만 어찌나 후딱 벗으시던지...
게다가 죽비를 치실 때에는 괜히 경건해져서 사진기는 생각도 못했다.
정신 차리고 좀 찍으려니 벌써 원위치..
길도 모르면서 먼저 갔다고 어찌나 전화로 화를 내시던지..정말 친구 맞나 싶게 말이다.
도착한 일장스님도 좀 삐지신 것 같기도 하고 계속 툴툴대시고..
욕을 하도 먹어 글발이 안 산다고 옆 스님이 허허 웃으시고..
정말 스님들의 대화는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 옆에 있으면 쫄기도 하고 긴장도 하고 그러다 빵 터지기도 하고..

가온건축 식구들, 현장 소장님과 일하시는 분들, 그리고 우리 구들도 놔주시고 스님과의 빵빵한 인연이 있는 주승씨네 식구들(아기들이 모두 3명인데 어찌나 다 예쁘고 잘생겼는지...)
알고 보니 주승씨와 나는 동갑이어서 괜히 막걸리 마시면서 친한척 많이 했다 ㅎㅎ
소장님은 1년에 집을 딱 한채만 짓는데 올해는 그게 우리집이란다.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 집이니 나름 애착을...
소장님은 카톨릭 신자시고 우리는 기독교...근데 우리는 모두 불교식(?)으로 했다.
하나님도 보시면 흐뭇해 하실거다 ㅎㅎ

자리 정리하고 돌아가면서 쌍둥이네 들러 떡도 드리고 정견스님 청매암에도 들리고..
하루종일 운전하느라 술도 못 마신 용가리를 위해 소주 한 병과 새우깡을 사서 수월암으로 돌아와
어둠이 내린 청명한 수월암 마당의 빗소리를 들으며 잠시 용가리의 술잔을 같이 봐주고...
언제나 가뿐한 수월암의 아침. 차례로 천왕봉 보이는 뒷간으로 달려가 볼일 보고
마당에서 세수하며 지리산 한 번 쳐다보고...
일장스님댁에 들러 감사 인사드리고 우리는 차를 돌렸다.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계곡에 발이나 담그자는 의견에 가까운 칠선계곡에 가서 아무데나 차 세우고
어제 먹다 남긴 새우깡 한 봉지를 아침 삼아 돌려 먹으며 계곡에 발 담그고 시원한 바람 맞고..
자리털고 일어나 나오는데 나오다 정말 깜딱 놀랐다.
조금만 더 늦게 갔다면 우리는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할 뻔 했다.
난 그 곳이 그렇게 관광버스 많이 들어오는데인줄 처음 알았다. 계속 꾸역꾸역 차들이 들어왔다.
우리는 고개를 흔들며 언능 빠져나왔다...
스님과 자주 가던 인월 마당쇠 식당에서 착해도 너무 착한 가격 7천원에
견과류와 흑미를 넣어 지은 솥밥, 맛깔스러운 반찬, 군침도는 된장찌개를 배불리 먹었다.
사실 가격이 7천원이라는 것도 첨 알았다.
맨날 스님이랑 같이 가서 무슨 메뉴인지 뭘 먹었는지 잘 몰랐고,
또 착한 주인이 항상 무언가를 더 내 오던가 해서 식당의 정상 메뉴를 잘 몰랐던 것이다.
이번에는 스님이 안계셔서 반찬 두번 먹었다. 평소 스님은 반찬 두번 달라지 못하게 하신다.
이거 팔아 얼마 남는다고 주는거나 다 먹어라..이러신다.
근데 이번에는 정말 두번 내온 반찬 한톨도 남기지 않고 싹 깨끗이 다 먹었다.
그리고 매번 오전에는 잘 문을 열지 않아 발길을 돌리던 안내소 앞 까페 '제비'에 들러 커피도 마셨다.
젊은 주인은 나를 알아보고 안부를 묻고 나는 아들 레오의 안부를 묻는다. 이제 걸어다닌단다. 많이 컸네..
용가리가 커피 안 마시겠다길레 3잔만 시켰는데 젊은 주인이 4잔을 내온다.
시원하게 트인 논을 바라보며 노닥거리다 이제 정말 서울로 가야할 시간.
아까 마당쇠에서 반주로 석잔 마시고 남겨온 소주병을 옆에 끼고 차에 오른다.
서울 입성할 때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나머지 소주가 필요할 것이다.

집에 와서 딸내미를 보고 그랬다.
너 결혼식할 때 엄마 입을 옷이랑 음식이랑 다 정했어.
뭐?
음...엄마는 굵은 삼베로 된 미색저고리와 초록색 치마를 입을거야..그러니까 9월쯤 결혼하는게 좋겠다.
너무 쌀쌀해지면 삼베한복 입기는 그렇잖아?
그리고 결혼식 음식은 일단 국수, 두부, 돼지고기수육, 부추전, 갓 담은 김치 그리고 떡이랑 과일.
엄마는 그날 한복입으니까 음식 하기는 그렇지? 사람을 좀 써야겠네...아주머니 두세분..
국수는 멸치국물로 하고 돼지고기는 지난번 삼겹살 샀던 마천 식육점에서 사서 마당에서 삶으면 되겠지?
두부는...두부는 집에서 할텐데 전날 해 놔야 하남? 그래도 바로 한 따뜻한 두부가 맛있는데..
그럼 새벽에 일어나 준비해서 그날 해야겠다.
그래도 기름냄새는 좀 나야 하니까 부추 넣고 청량고추 썰어 넣은 담백한 부추전으로 하자.
마천 땅벌 떡 방앗간에서 떡 해 오고 과일은 그때 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막걸리..
엄마가 담글까도 생각했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안되겠어.
유림이나 남원가서 사 와야지..둘 다 무슨 품평회에서 1등했다니까..
너댓말은 사야겠지..큰 항아리를 놓고 거기다 부어 놓아야겠다.
그리고 커다란 박 박아지를 메달아 놓고 큰 항아리에 찰랑찰랑 담긴 막걸리를 작은 단지에 퍼 담아 상에 놓는거야.
모자라면 사람들이 큰 항아리에서 퍼 가면 되고..
자..이제 세팅해 보자.
마당에 상을 대여섯개 펴고 젓가락을 놓고 음식을 놓고..
참 국수그릇은 스텐이나 플라스틱 아무거나 해도 되지만 막걸리 잔 만큼은 꼭 막사발로 해야 해...
그리고 막걸리 담아 놓을 작은 단지도 꼭 있어야 하고 그 작은 단지에는 또 작은 표주박이 있어야 하고..
너도샘에게 표주박 대여섯개 더 만들라고 해야지 ㅎㅎㅎ 능력되면 큰 박아지도 말야..큰 항아리용으로..
그리고 너 그날은 꼭 우리집 구들방에서 자고 가야 한다. 신혼여행은 그 담날 떠나

거침 없이 쏟아내는 내 말을 다 듣고 나니 우리 딸내미 표정이 압권이다.

아..그리고 이렇게 하면 모든 비용이 공짜..이 엄마가 낸다는 뜻이지. 근데 다르게 하려면 니 돈으로 해야해 알지?

우리 딸내미
헐.....나도 그때 가봐야 알겠네..

어쨌든 엄마의 계획을 미리 알려주는거야. 참고하라고 말이야.

푸하하하...아...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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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도바람 2013/09/02 17:09

    좋것다. 하나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가피를 듬뿍 받는 제비님은..
    스님 가사 입은 것, 카페 제비 기타 등등... 모든 사진 내게 있으니 내일쯤 올리겠음.

    • 제비 2013/09/09 20:12

      너도님의 뒷담화를 읽으니 같이 있었더 이야기지만 무지 가슴이 뻐근하네요 ㅎㅎ

  2. 美의 女神 2013/09/02 17:43

    이런 뒷담화는 환영임다. ^^
    '작은 집 큰 생각' 책도 읽어보고...상상해봅니다.
    과연 나는 얼만한 집이 필요할걸까?
    대리 만족이 때로는 더 즐겁습니다.

    • 제비 2013/09/09 20:13

      맞아요...집은 갖고 싶은 집 갖고 있는 친구를 갖고 있으면 되지요 ㅎㅎ

  3. huiya 2013/09/02 19:03

    뒷담화 좋으네요...
    근데, 큰형님이 누구세요, 저도 똘마니가 되고 싶다는...

    • 제비 2013/09/09 20:14

      ㅎㅎㅎㅎ
      스님하고 지리산 동네를 다니다 보면 마치 큰형님 밑에 있는 똘마니가 된 기분이 들어서요..
      즉 큰형님은 스님 되겠습니다.

  4. 찌니 2013/09/02 22:05

    댓글 써도 되겠지?
    블로그 하는 줄도 몰랐고
    상량식 하는날 인줄도 모르고 참 무심했네. 쏘리!
    마치 한편의 단편 소설을 읽는 듯하이. 어려서 아버지가 상량식하던 날이 생각난다.

    • 제비 2013/09/09 20:15

      잘 지내지?

  5. chippy 2013/09/03 23:44

    벌써 따님 결혼식 세팅까지...ㅎ...오래오래 지리산 자락에서 행복하실 예감입니다. 세수하고 지리산에 인사하는 하루의 시작, 생각만해도 좋아요. ^^

    • 제비 2013/09/09 20:16

      감사드려요...이런 완전 좋은 덕담을..

  6. 알퐁 2013/09/05 19:27

    축하합니다, 상량식과 앞날에 있을 따님 결혼식 땅겨서 모두...
    삭힌 홍어가 빠졌네요? ㅎㅎ

    • 제비 2013/09/09 20:16

      앗! 삭힌 홍어까지...역쉬 고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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