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점점 세차게 내려 덕유산 지날 때까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지리산 근처로 들어서자 비는 잦아들고 촉촉한 느낌이 상쾌한 정도...
수월암으로 들어서자 스님이 꿀 한보따리를 내어 놓으신다.
양봉하는 이웃에게서 꿀을 한 말 사셨다고 두루 나누어 주라 하신다.
나는 꿀을 잘 모르고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이 꿀은 좋은 꿀임에 틀림없다.
전에 내가 스님께 어떤 꿀이 좋은 꿀인지 여쭤봤을 때,
스님은 '파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면 좋은 꿀이지..' 하셨기 때문이다.
꿀을 따는 사람은 전에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스님의 왕팬이셨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한 가정의 가장인 남자 어른이 한 잔 하고 기분 좋아서 스님 가슴을 파고 들며
마구마구 스님에 대한 애정을 내뿜고(?)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 아이고 스님 닳겠다..그만 더듬어라..ㅎㅎㅎㅎ' 하고 웃었다.
이런 분이 스님께 내어드린 꿀이기 때문에 확실히 좋은 꿀임에 틀림없다.
점심은 인월 북경반점에 가서 불타는 짬뽕을 땀을 뻘뻘 흘리며 개운하게 먹었다.
동행한 항우아저씨는 한때 일박이일 이승기가 먹어서 떴던 남경반점은 망해가는데 북경반점은 여전히 건재하다고..
역시 맛으로 승부하는 것이 중국집이라고 전에부터 북경반점이 훨 맛있었단다.
마천으로 넘어가 천왕봉 바라보고 앉아 있는 우리집으로 갔다.
이제 벽이 생겼고 창문도 달았다.
설님 말대로 아기가 크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현장 소장님에게 와인 한 병을 안겨드리자 '이거 뇌물 맞지요'하면서 유쾌하게 받으신다.
일하시는 분들께는 함양 시내에서 준비한 도넛과 커피를 건네드렸다.
함양에서 용가리는 롯데리아를 보고 햄버거가 어떻겠냐고 했지만 이렇게 비오는 날은 달달한 것이 땡기니까
도넛이 좋다고 우겨 준비했는데 역시 내 말이 맞았다. 아주 좋아하셨다.
월요일 미장을 하고 잘 말려 이제 본격적으로 내부 공사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조금 더 서두를 수도 있었지만 직원 한 분이 며칠 못 나오다가 어제 복귀해서 조금 더 지체되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아이를 기다렸는데 드디어 아내분이 출산을 했단다. 그것도 쌍둥이를...
그런데 아가들이 조금 일찍 나오는 바람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단다.
근처 병원에 인큐베이터가 없어 부산 병원까지 가서 입원하느라 며칠 일을 쉬어야 했다고.
좋은 일이니 일 늦어진다고 뭐라 할 수도 없었다고. 당연히 좋은 경사이고 아가들이 무사히 퇴원했다니 다행이다.
급할 것 없으니 말릴 것 잘 말리고 서두르지 말고 차근히 해 나가기로 했다.
터 좋은 구들방. 비오는 날 뒹굴거리며 책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구들방 아궁이.
능선과 봉우리들은 구름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정견스님 토굴에 들러 방송출연 축하해 드리고 (EBS 한국기행 함양편 도솔암 촬영에 꽤 많은 분량으로 출연하셨다 ㅎㅎ) 차를 나누었다.
동네분들도 와 계셨는데 이야기 속에서 가을이 흠씬 묻어나온다.
'아직 쌀 안 나왔지'
'추석이 내일 모레니 이제 나오기 시작하겠죠'
'엊그제 전화가 왔어. 나더러 쌀 한 자루 가져가겠냐고 하길래 이 정신나간 놈아 낼 모레 햅쌀 나오는데
묵은 쌀은 왜 가져가라고 하냐고 했지'
'맞아 그 쌀은 떡하믄 되지 이제 햅쌀 나오는데..'
'스님들이 무슨 낙이 있나..토굴에 앉아 쌀이나 좋은거 먹어야지 ㅎㅎ'
'맞아 맞아 햅쌀 먹어야지 지금 묵은 쌀 쟁여놔서 뭐하남'
이야기는 호두로 넘어간다.
'요새 호두 나왔나'
'이제 나오기 시작하는데 아직 꼬순 맛이 덜합니다'
'얼마나 하나'
'1킬로에 2만원 백다섯개랍니다.'
'백다섯개?'
'그게 웃긴게 시골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니께요..그냥 저울에 달믄 되지 꼭 백다섯개를 세어야 한답니더'
'백개면 백개지 다섯개는 또 뭐꼬?'
'지가 저울에 달아봤더니 백다섯개가 나왔나보지요'
'그럼 저울 달아 나누면 되지 그걸 왜 세고 있나?'
'그러니까 웃기지요..허리 아프고 할 일 많아 죽겠다믄서 곧 죽어도 백다섯개씩 세야 한답니더'
'참..내...그거 세지 말라고 저울이 나온거 아닌겨? '
'그니까 못 말린다니까요'
나도 호두 백다섯개 사 먹고 싶었다 ㅎㅎ
호두는 胡桃오랑캐 복숭아 즉, 서양 복숭아라는 뜻이란다. 껍질있는 호두를 보면 복숭아와 닮긴 닮았다.
복숭아는 과육을 먹고 호두는 씨앗을 먹지만 말이다.
나에게 있어 쌀이란 햅쌀이건 묵은 쌀이건 그냥 다 똑같다. 추석이라고 햅쌀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집에 그냥 떨어지지 않게 갖추어두는 정도....
호두 역시 사시사철 사 먹을 수 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진짜 보니 여기 저기 호두나무 터는 곳이 많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구들 잘 놔 주신 주승씨 잠깐 만나 역시 와인 한 병 감사의 뜻으로 안겨드리고
저녁은 순일아저씨 식당으로 갔다.
지금 밀고 있는 메뉴, 청국장 두루 쌈밥...청국장과 돼지고기두루치기와 쌈이 나오는 것이다.
단풍철 행락객들을 공략할 것이라며 현수막도 여러개 만든 것을 보여주신다.
스님을 보자 반색하시며 귀여운 도마와 사시미칼을 가져나온다. 무얼까...
엄청 커다란 수삼을 내와서 우리 앞에서 사시미칼로 마치 한점한점 회를 뜨듯이 정성스레 삼을 썬다.
그리고 꿀에 찍어드시라 한다.
'옛날 내 밑에 있던 동생이 가져온 거라...꽉 채운 6년근인데 제일 큰 놈으루다 가져왔지..'
'내가 옛날에 좀 잘나갔었거던...이 동네에서 나한테 함부로 못하지..아무리 나이 많아도 자네..뭐뭐 하게..그러지. 근데 유일하게 나한테 이놈 저놈 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 바로 우리 마누라..내가 미친다니까..'
옆에 있던 동네 사람
'아이고..그래도 저번에 2박3일 놀러 갔을 때 영심이(마누라)가 해 준 밥 먹고 싶다고 울었잖아'
ㅎㅎㅎ
'순일아저씨 대빵이셨나봐요. 원래 우두머리는 체구도 작고 인상도 부드럽잖아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덩치 크고 우락부락하지' 내가 한 마디 거들자
'맞아 맞아 뭘 좀 아는구먼..'하면서 좋아하신다.
스님 덕에 동생이 가져온 6년근 엄청 큰 삼 나도 잘 얻어 먹었다.
청국장 두루 쌈밥이 대박나기를 바란다.
스님은 먼저 돌아가시고 우리는 남아 잠시 식당에서 소주 한 잔. 오랜만에 차도 없어 용가리도 같이....
같이 술 먹었는데 순일아저씨가 차로 데려다 주셨다. ㅎㅎ
실상사 입구에서 내려 용가리와 수월암까지 걸어갔다.
비 그친 청량한 밤에 술기운에 취하고 밤기운에 취하고...말 그대로 그 길은 수. 월. 암 길이다.
다음 날은 햇살이 쨍쨍하다.
스님은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신다.
새벽도 그냥 새벽이 아니라 3시!!
잠결에 듣자니 깜깜한 새벽에 전화도 오고 손님도 찾아 온다. 허걱!!
개기고 개기다가 7시 반에 일어났다.
어제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술먹고 운전하다가 논두렁에 차를 쳐박았는데 동네 사람들 보기 민망해 새벽 6시에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차를 견인했단다. 그런데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더란다. 그 사람들은 5시부터 나와서 일했으니까....
추석 벌초 인파 때문에 길이 막힐 것 같아 우리도 일찍 출발했다.
오는 길에 한 번 더 우리집에 들렀다.
어제와 달리 쨍쨍한 가을 하늘 아래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집도 반짝이고 햇살도 반짝인다. 천왕봉은 깨끗하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창원마을 사람들이 호두를 턴다.
이제 우리집에서는 천왕봉을 찾을 수 있다.
우리집 누마루 옆에 있는 밤나무. 우리 땅에 있으니 우리 것이 맞겠지? 아님 말구...
너무 신기해서 입을 헤 버리고 있으니 저것은 모과가 아니라 박이 모과나무에 넝쿨을 타고 올라가 열린 것이란다.
박을 보고 모과라고 호들갑을...챙피시러버라..
도시의 가을과는 다른 가을을 만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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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스럽게도 덕유산 부근에선 한치 앞도 안 보이게 쏟아지다, 지리산에 접어들면 말개지는걸
여러번 경험했네 그랴. 퇴수정 순일씨는 나와 동갑이라고 술김에 무지 반가워했는데, 아마 잊었을걸.
USB 사건을 보면 말야. 대박나서 순일씨 얼굴이 싱글벙글했으면 좋겠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보다
제비의 큰형님 나와바리의 지리산 사람들, 시리즈가 훨씬 더 재미있네 그랴. 진솔하고...
느무 느무 맛있는 빈대떡 산데미처럼 부치고 나니, 옆동네 살면 뛰어오라 했으면 좋겠다 싶은걸.
추석 잘 보내시게.
추석은 잘 보냈고 빈대떡은 먹고 싶고
백다섯 개 호두 이야기 참 재미있어요^^
동네 참 예쁘네요. 고즈넉한 듯하나 시끄럽지 않은 작은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릴 것 같은...
시끄럽지 않은 작은 소리들이 끊임 없이 들릴 것 같다는 말이 참 좋네요
세상에 근심은 하나도 없는 분이구만요.
덩달아 잠시 힐링.^^
그런 척 하고 사는 거죠 뭐 ㅎㅎㅎ
부럽심다...완성되면 저두...ㅎㅎ
그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