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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

미장원 2013/09/26

by jebi1009 2018. 12. 25.


       

어제 파마하러 미장원 다녀왔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나이 탓인가 아님 머리에 그다지 신경이 안 쓰여서 그런지 미장원 한 번 가기가
결심에 결심을 거듭해야 한다.
긴 머리 파마는 최소 3시간이기 때문이다.
3시에 예약하고 다녀오니 7시가 넘었다. 우리집에서 미장원은 차로 10분 정도...
그러니까 그 긴 시간 중노동(?)하고 온 것이다.
나는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나 할머니들이 왜 파마할 때 항상 쎄게 말아줘...이러는지 알겠다.
너무 힘들어서 자주 못하니까 그런 것이다.
나도 어제 그랬다. 쎄게 말아달라고...

미장원에 가면서 들고 간 오소희의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에 마침 미장원에 대한 글이 나왔다.

독한 파마약 냄새,
석유곤로 위에서 발갛게 달궈져가는 고데기,
예뻐지기 위해 기꺼이 단백질을 태우는 머리카락,
탁자 위에 흩어진 [선데이서울],
슬쩍 한두 마디 던지는 것만으로도(영철이네 곗돈 탔나?)
용케 꺼져가던 수다의 불씨를 살려내는 미용사 아주머니,
그 아주머니의 막내아들이 홀로 곁방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나
칭얼대며 어마 곁을 서성이던 풍경들....

비엔티안의 조용한 골목에서 나는 그 오래된 풍경을 찾았다


사실 나는 이런 미장원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나도 분명 머리를 잘랐는데 어디서 잘랐는지 강렬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엄마가 잘라줬나?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동네 미용실에서 커트를 했다.
그냥 입 다물고 너무 짧지 않게 되기만을 바라고 있어서 주변 느낌이 어땠는지 기억이 없다.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한 번 해보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파마를 하러 간다.
그 때는 대부분 이대 앞으로 갔다.
이대 앞에는 20대 여자들이 눈을 돌릴 만한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으니 당연하다.
나도 언니를 따라 이대 앞에서 처음 파마를 했다.
그렇게 파마계에 입문하면서 친구들과 미장원 가서 머리 하고 맛있는 거 먹고 그랬다.
아니면 엄마가 하는 샵에 따라가서 무슨무슨 선생님에게 머리를 하기도 했고..ㅎㅎㅎ
졸업하고 선생으로 발령이 났을 때 나의 발령 동기였던 첫 학교 친구의 권유로
지금까지 내 머리를 맡아 준 '그녀'를 만났다.
그 미용실은 압구정동에 있었는데 엄마가 다니는 샵 보다 저렴했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지금 보다는 자주 갔지만 그래도 1년에 네다섯번이니까 그 정도 지출은 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영화배우 최민식도 봤다 ㅎㅎ
친구랑 나는 시험 때나 개학이 임박했을 때 미장원에서 만났다.
학교를 옮기고도 만나는 장소는 거의 그 미장원이었다. 머리도 하고 수다도 떨고 밥도 먹고...
내가 딸내미를 낳고 다시 학교로 복직하기 전에 미장원에 갔다.
그녀도 임신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가니 배가 만삭이었다.
하루 종일 서 있고 약품 냄새 맡고 괜찮을까....걱정되었다.
산가 내서 쉬다가 다시 나올 것이라 했다. 미용업계에서는 거의 없는 일이라 했다.
보통 자기 가게가 아니고 직원(?)으로 있는 경우에 산휴까지 주면서 계속 유지하는 일은 드물다 했다.
그녀는 그 미장원에서 가장 고객이 많았다.
다른 미용사는 놀고 있는데 혼자만 매번 바빠서 밥도 못 먹었다.
그리고 자기 밑에 있는 직원들 교육도 꽤 깐깐히 시켰다.
가끔식 들린다.

**야 오늘 맛있는거 사줄게 남아서 염색 테스트 해 보자.
너 가발 커팅 연습 끝냈니? 오늘 남아 내가 봐줄게..

그녀가 아이를 낳으러 간 사이 나는 다른 미용사에게 머리를 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1년에 한 두번 항상 연수도 다녀왔다. 파리나 이태리로...
연수가 어땠냐고 물어보면 어떤 때는 좋았고 어떤 때는 높은 사람 뒤치닥거리만 하고 왔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나는 머리 하면서 보통 책을 보거나 졸거나 하지만 그래도 간간히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일하는 여자들의 공통적인 문제가 많았다. 육아문제나 자신의 성취감 같은 이야기...

그러다 그녀가 미장원을 옮겼다.
청담동 유명 샵으로 갔다.
이름 대면 다 알만한 연예인들도 많이 다니는 곳이다.
머리하러 갔다.
압구정 미용실도 괜찮았지만 이 곳은 건물 전체가 미용샵이다.
처음 자리를 옮긴 그녀는 2층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4층, 5층 오너의 자리 바로 밑이다.
그 곳은 여자들의 허영을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우아한 실내 공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직원들의 태도
당신이 머무는 동안에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모두들 특별 대우를 해 준다는 느낌을 준다.
일반 카페에서 먹을 수 있는 보통 메뉴는 다 갖추고 있다.
간단한 토스트와 다과도 있다. 돌아갈 때는 원하는 음료가 있으면 가시면서 드시라고 테이크아웃도 해 준다.

물론 머리 가격도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그 데미지를 줄여주기 위해 다른 결재 방법을 제안했다.
선 결재하고 그 금액에서 한번 비용만큼 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20퍼센트 할인이 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한 번도 내 파마 값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고 한 적이 없다.
그녀도 나에게 가격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알아서, 진짜 알아서 쓸데 없는 것 안 해주고 받기 때문에
나중에 결재할 때 그리 확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비용 결재는 항상 밑에 직원(그들은 스텝이라 부른다)이 조용히 다가와서 생글생글 웃으며 말해 준다.
나는 이리저리 생각해 본 결과 그렇게 했다.
사실 미용실을 바꾸는 것(정확히는 미용사)은 쉬운 일은 아니다.
다시 처음부터 이리저리 이야기해야 하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알아서'해 주기 때문이다.
처음 목돈으로 결재할 때는 부담스럽지만 이제는 1년에 한 두번밖에 가지 않으니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다.
옛날에는  길렀다가 잘랐다가 파마를 했다가 좍 폈다가 바람머리를 했다가 변화를 추구했지만
이제는 그냥 방치하고 너무 길었다 싶고 너무 늘어진다 싶으면 한 번 가서 힘 주고 오기 때문에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 샵에서도 고객이 가장 많았다.
그녀와 알게 된지 20년 쯤 되었다.
내가 물어봤다.

아직도 일이 재밌어요?
네 재밌어요. 언니는요?(그냥 거기는 다 언니 아니면 사모님이다)
나는 재미없어진지 오래됐어요.

지금 그 샵의 오너는 꽤 유명한 헤어디자이너인데 지금은 경영만 한다고 했다.
그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보다 두세살 정도 어리다.
내가 언제까지 머리 할 수 있냐고 했더니 자기도 고민이란다.
경영쪽으로 가야 하는데 골치 아프다고...
내가 그랬다.
70넘은 은발의 미용사가 머리 자르는 모습도 멋있겠다..
맞아요..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건데.. 하면서 활짝 웃는다.
그때는 정말 돈 벌 것 걱정 안 하고 내가 받고 싶은 손님만 받아서 여유 있게 그렇게...

그녀는 지금 관리하는 고객이 6,7백명 쯤 된다고 했다. 허걱!!!
그런데 정말 대단하다. 그 고객의 모든 것을 정확히 다 기억한다.
내가 1년 만에 가더라도 1년 전 머리 하면서 했던 이야기 내 근황 등을 다 기억한다.
전에는 3년 만에 온 손님이라며 나에게 살짝 이야기해 줬는데 의정부에서 여기까지 왔단다.
기분 전환하려고 3년 만에...근데 그녀는 3년 만에 온 그녀를 모두 기억했고 그녀의 기분 전환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녀는 대단한 능력가다.
항상 손님이 많아 예약을 해도 서너명은 기본으로 같이 진행하게 된다.
내 커트를 끝내고 파마 말고 옆 자리에 있으면(무슨 기계 속에 들어간다) 다음 손님 커트하고..이렇게
다른 사람 머리 하면서 지금 진행중인 모든 사람들의 머리를 다 체크하고 확인한다.
커트하는 손님에 맞게 이야기 하면서 기분 맞춰주다가
스텝에게 '**씨 귀쪽에 티슈 한 번 더 대드려..흐르지 않게' 이런다.
아니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며 머리 자르면서
내 파마약 흐르는 것은 어찌 알았남?

그녀는 천개의 얼굴과 혀를 가졌다.
속물스러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얼굴을, 문화적 허영기가 많은 사람에게는 그런 얼굴을
자랑쟁이에게는 부러운 얼굴을...
난 여자들만 미장원에서 맘껏 허영심을 채우는 줄 알았는데 남자들도 그런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어떤 잘난척쟁이 남자 때문에 옆에 있는 내가 다 피곤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배경과 자신들의 소지품을 자랑한다. 마치 자랑이 아닌 것 처럼...
투덜대는 듯 하면서 자신의 직업과 일에 대해 자랑한다. ㅎㅎㅎ

한번은 그런 적도 있었다.
내가 예약하고 갔는데 두명의 여자가 끼어들어 내가 자꾸 시간이 지체되었다.
두 여자는 엄청 말이 많았는데 대충 들어보니 선생인 것 같았다. 그것도 그냥 평교사는 아닌...
그녀는 속도 있게 일하면서 말도 받아 주면서 빨리 끝냈다.
두 여자는 더 이야기하며 있고 싶어했지만 그녀는 재치 있게 얼른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와서 미안하다며 얼른 해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선생님들? 내가 묻자 아니라고 했다.
아주 돈 많고 그 쪽에 엄청 영향력을 주는, 그러니까 치마바람의 대가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나 보다 더 자세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가 2월이라 인사이동이 있었던 시기인데 별의 별 것을 다 알고 주무르고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선생인 것을 알고 있었다. 발령 동기가 같은 학교에 있다고 소개해 줬기 때문에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샵에 오는 그녀의 고객 중에 나는 그냥 근로여성(?)쯤 될 것이다. ㅎㅎ
내가 그런 적도 있다.
'나도 팁 좀 드려야 하는데 맨날 그냥 가서 어쩌지..'
사실 그 곳에서는 대부분 자기를 맡은 디자이너나 스텝들에게 팁을 주고 간다.
옛날에 우리 엄마 따라 샵에 갔을 때 엄마도 줬었다.
엄마는 뒤통수가 근지러워서 그냥 못 나오겠다고 했다.
그녀는 웃으며
같이 돈 버는 처지에 별 걱정을 다 하신다고 했다.
사실 돈도 돈이지만 난 그녀에게 별로 주고 싶지않았다. 그녀가 속으로 욕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프로다.
내가 어설프게 오바하려고 들면 그냥 나는 그녀의 고객일 뿐이라는 면을 살짝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가끔 필이 통한다 싶으면 내 속을 확 내보여서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주 멍청하고 바보같은 짓이다. 나도 세련되게 사람들을 상대하고 싶다.....쩝...

어제 갔더니 거의 1년 만에 온 나를 보고 마치 어제 본 듯 이야기 하며  추석 선물이라고 천연비누도 챙겨줬다.
풍성하게 컬이 살려진 내 머리를 보고 빨간 색으로 몇 줄씩 염색 넣어 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정말 잘 어울리겠다며..
그리고 1년에 한 번씩이라도 좋으니 얼굴 보여주고 오라고 했다.
왠지 불안하다며...뭐가?
내가 앞머리에 이어 뒷머리까지 부엌가위로 자르게 될 것 같아서 불안하단다 ㅎㅎ
헤어디자이너로서 그것은 정말 안될 말이라며 일 저지르지 말라고 했다.
허걱! 어찌 알았지?
나는 이제 그 곳에 그만 가려고 하는데...
이제 그 돈을 지불할 만큼 머리에 별로 애착이 없다.
쫑쫑 땋고 다니던 부엌가위로 댕강 자르던 백발마녀처럼 풀어헤치고 다니던....
가끔 그녀가 그리우면, 그리고 그 허영기가 그리워지면 20퍼센트 할인을 포기하고 그냥 갈 수밖에 ㅎㅎ
그녀가 오래 가위를 잡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도 마음이 꽉 차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녀가 나중에 아주 나중에 허무함을 갖게 될까봐 살짝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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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uiya 2013/09/26 18:35

    미용사와 식당은 바람을 피우지 못한데요. 저도 맞는 미용사가 있으면 비행기타고 날라가던지 아니면 제가 자릅니다. 10년이상 다니다가도 너무 성의가 없으면, 그냥 관두지요.

    • 제비 2013/10/02 18:46

      긴 머리는 모르지만 짧은 머리를 자르는 경지까지..대단하십니다.ㅎㅎ

  2. chippy 2013/09/26 21:21

    저도 인용하신 저 미용실에 대한 기억이 나요. 물론 어릴 때, 엄마 따라갔던 미장원에서죠. 곤로 위에 올려놓은 고데기며, 때로 수건을 삶는 찌그러진 세숫대야 같은 게 올려져 있기도 했어요.
    여기서도 한국인 미용실을 가는데요, 1년에 한 2-3번? 유일한 사치라 할 수 있지요. 그닥 스타일리쉬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도 머리만은 포기가 안되요. ㅎ...도저히 그냥 마구 기르거나 이곳 미용사에게 맡기기엔(진짜 커트는 너무 못해요.)...진정 내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몰라도..ㅋ.
    지난 번에 미용사를 바꿨어요. 토론토엔 한국 미장원이 너무 많아서 경쟁도 치열하다더군요. 한국의, 서울의 대단한 샵 같은 곳은 절대 꿈꿀 일이 아니지만, 몇 백불도 더 할테니까요, 대체로 동네 미장원 정도 분위기예요. 다만 도우미나 연습생이 없고 오직 한 분이 다 하시죠.

    • 제비 2013/10/02 18:47

      내 친구도 한국에 오면 꼭 미장원 들렀다 가더라구요..가격도 스타일도 다 만만치 않아서 그런가봐요.

  3. 알퐁 2013/09/27 07:01

    키위 같으세요, 한 미용사한테 그리 오래 가시다니...
    여기 키위들은 한 번 마음에 들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20년이고 30년이고 갑니다.
    한번은 한 미용사의 고객이 와서 자기 미용사 어깨 치료해달라고 선불하고 간 적도 있어요. 자기 미용사가 아파서 일 못하면 자기 머리 못해준다고, 자기 미용사가 저한테 치료 받는다고 들었다고 ㅎㅎ

    긴 머리는 혼자 자르기 쉬워요. 층진 머리를 원하시면 물구나무 서듯이 완전 거꾸로 머리를 빗어서 한번에 잡고 싹둑 자리고 똑바로 서면 층이 자르르...ㅎㅎ (미용사들한테 층이 바르지 않다고 혼나니까 그 뒤로 안 가면 됩니다) 생각보다 짧게 길이가 나오니까 좀 긴 듯하게 자르면서 길이를 맞추시면 됩니다.

    그 미용사 굉장히 매력있네요. 프로답고...
    같은 고객을 오래 대하다 보면 프로답기가 힘듭니다. 각자 사생활 얘기 다하고...특히 저 같은 경우에는 한 시간을 한 사람하고만 있다 보니...제게 관심을 갖고 제 신상을 캐는 사람도 있는데 전 그냥 알려 줍니다. 물론 저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온 거 아니다 끊임없이 제 자신한테 말하면서요. 열린 태도로 무엇이든 함께 나눌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게 중요한데 반면에 그들이 주인공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뭐 그런 딜레마 아닌 딜레마가...
    우리쪽 직업윤리에 고객이 친구가 되면 다른 치료사에게 보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게 참 애매합니다 ^^:;

    • 제비 2013/10/02 18:48

      알퐁님의 가르침으로 긴 머리 층지게 한 번 잘라봐야겠어요..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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