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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몽땅 휘발되기 전에

by jebi1009 2025. 2. 17.

갑자기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제주도 바닷가 까만 현무암 사이에 아기 바구니가 놓여 있는 장면.

그러면서 그 장면에 얽힌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젊은 해녀 엄마가 아이를 이웃 할머니에게 맡기고 도망가는 이야기. 

아이가 운다고 젊은 엄마를 때리는 남편.

이 이야기는 어디서 봤던 거지?

한참 생각한다.

그러다 얼마 전 읽었던 <작은 땅의 야수들>이 기적처럼 떠올랐다.

맞아. 이 책의 주인공 '옥희'의 마지막 생을 보내는 장면이었지...

옥희가 제주도로 가서 해녀들 틈에서 살면서 결국 도망간 젊은 해녀 엄마의 아기를 키우게 되는 장면.

 

요즘은 머릿속에 어떤 이상한 물질이 들어갔는지, 읽고 듣고 보았던 것이 돌아서면 바로 휘발되는 것 같다.

알고 있던 음악도, 알고 있던 인물도, 알고 있던 문구도, 알고 있던 영화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 이게 뭐더라....' 이런 상태가 일상이 된 것 같다.

단편적으로 기억이 나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연결된 것인지 생각해 내려면 한참 애를 써야 한다.

 

엊그제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제주 바다가 떠오르면서 책의 내용까지 생각해 연결하느라 애를 썼다.

그러면서 최근 읽었던 책들을 떠올렸다.

뭘 읽었나...

요 근래 읽었던 책 중에서 심심하면 끄적거리려고 사진으로 남겨 놓은 책들이 있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책들이 그냥 평이해서 별 감동이 없었다고...

그래도 막상 책 장면이 떠오르면서 다른 이야기들도 생각나는 것을 보니 책은 책이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김주혜 작가의 작품으로 '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찾아 읽었다.

영어로 발간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다.

번역한 느낌이 전혀 없이 잘 읽힌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주인공 '옥희'를 통해 굴곡진 삶과 역사를 이야기한다.

'파친코'를 읽지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다.

호랑이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호랑이를 쫓다 눈밭에 누워버린 사냥꾼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최재천의 <양심>과 유홍준의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는 두 사람의 회고록 같은 느낌이다.

사실 <양심>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양심'을 논하는 책인 줄 알았다.

'양심'이라는 것이 생존에 유리할 것 같지 않은데 왜 갖게 되었을까? 이런 것에 대한 답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은 최재천 교수님의 활동 중에서 '양심'이라는 테마로 묶일 수 있는 몇 가지를 뽑아서 정리한 것이다.

최재천 교수님의 유튜브에서 방영된 것을 좀 더 세세하게 풀어놓은 것이다.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어차피' 먹을 욕이라면 '차라리' 화끈하게 덮어써 보자는 속셈으로 참여하게 된 일들을 소개한다.

대표적으로 호주제 폐지, 돌고래 제돌이의 방류, 동물 복제에 관련된 일들...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는 유홍준 교수님의 다양한 경험과 깊이 있는 안목, 폭넓은 인간관계 속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소개한다.

여기저기 발표했던 글들과 그 뒷이야기를 통해 다시 회고하는 것이다. 

리영희, 백기완, 신영복, 김민기... 그리운 이들의 이름과 그 삶을 다시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딸에 대하여>는 동성 파트너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 딸을 가진 엄마의 이야기다.

또 다른 한 축은 요양보호사로서의 엄마의 삶이 나온다.

나 자신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데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렵고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공감할 수 없는 큰 부분이 있다는 것이 아프다. 딸이라서 더 아플 것 같다.

좋든 싫든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넘길 수 있을 텐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가갈 수 없어 답답하다.

그리고 다른 축은 아무리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살아왔다고 해도 혼자 늙어 아픈 사람은 비참하게 버림받는다는 요양원 이야기.

이제는 요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노인의 이야기가 좀 더 밝게 그려졌으면 좋겠다.

결국 나 자신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맞이하게 될 부분이니까 말이다.

스스로 만족하는 요양원 생활을 하는 노인은 지금 우리나라에 없는 것일까?

집보다 요양원을 더 선호하는 노인은 없는 것일까? 

 



해마다 <젊은 작가 수상작품집>은 챙겨 보려고 노력한다.

올해, 아니 작년 수상작품집은 그리 공감 가는 작품이 없는 것 같다.

대상작 '이응이응'은 기발하다고도 생각했지만 공감은 미약했다.

다른 작품들도 금방 휘발되어 버렸다.

내가 지체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당연히 나는 점점 지체되어가고 있겠지만 정서적 공감도 지체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요 근래 읽은 책들은 책을 읽었다는 맛이 별로 없었다.

뭔가 허전하고, 차오르는 느낌이 없다.

팍 꽂히는 책을 읽고 싶다.

 

몽땅 휘발되기 전에 끄적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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