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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풍농월

눈 쌓인 백장암 2013/12/24

by jebi1009 2018. 12. 26.



지리산의 하룻밤은 너무 짧다. 두 밤 자러 가 보자...
금요일 아침. 지난 밤에 남쪽 지방에는 눈이 많이 내렸단다. 괜찮을까?
옛날에는 눈이 오건 비가 오건 주먹만한 우박이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쳐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고!!
그런데 이제 나이가 먹은걸까...눈이 내렸다니 걱정이 된다.
에라 모르겠다..그래도 일단 고!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니 점점 눈이 내린 흔적들이 확연하다.
아...백장암은 일단 걸어 가야겠구나..
용가리는 눈이 조금만 내려도 백장암은 차로 올라가고 싶지 않단다. 나도 물론..
백장암에는 동안거 중이신 스님이 계신다.
백장암은 눈과 관련된 안 좋은 추억이 ㅠㅠ

때는 바야흐로 4년 전 12월 29일. 어찌나 강렬한 추억인지 날짜도 잊지 않는다...
역시 동안거 중이신 스님을 뵈러 가는 길이었다.
눈이 많이 내렸었다. 스님은 백장암 올라가는 길에서 기다리라 하셨다. 내려가겠다고..
우리는 그날 뭐가 씌웠는지 그냥 살살 올라갔다. 그 하얀 눈길을...
사륜구동으로 놓고 올라가니 살살 올라간다. 가다 안되면 내려오려고 했는데 눈쌓인 하얀 길이 살살 올라가지는거다.
스님 내려오시려면 힘드실테니 우리가 올라가면 칭찬받을게야....
거의 올라가니 내려오시는 스님과 만났다.
'니들 어떻게 올라왔냐'
'그냥 올라와지던데요..'
그. 러. 나.
백장암에서 차를 돌려 내려오려고 하자 차는 통제불능.
조금만 움직여도 낭떠러지로 구르게 생겼다.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용가리도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나는 이제 봄에나 와서 차를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혀를 끌끌 차시며 뭐라도 해 봐야지 멍청하게 있느냐며 빗자루와 밀대를 가져오셨다.
택도 아니었다.
간신히 보험사에 전화하고 인월카센타에서 사람이 왔다.
우리의 흑기사!!
겔로퍼에서 내린 다부진 체격의 흑기사는 장화를 신고 한 손에는 삽을 들고 나타났다.
그로부터 약 한시간이 넘은 백장암 내려가기 프로젝트가 실행되었다.
흑기사는 주변에서 삽으로 흙을 퍼서 굴곡진 내리막길에 뿌렸다.
자신이 타고 온 겔로퍼를 한 구간 몰고 내려가고 다시 우리차가 있는 곳까지 와서 우리 차를 몰고 내려가고..
또 굴곡진 곳에 흙을 뿌리고 또 자신의 차 몰고 가고 다시 올라와 우리 차 몰고 가고..
땅이 얼어 흙을 팔 수 없는 곳에는 자신이 올라오면서 군데군데 내려 놓은 모래주머니의 흙을 뿌리면서 내려갔다. 추위 속에 흑기사의 얼굴에는 땀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그냥 걸어가기도 힘들었다. 길이 워낙 미끄러워 몇 번 넘어지며 내려가야만 했다.
밑으로 내려오자 땀방울 맺힌 얼굴로 흑기사가 그랬다.
'사륜구동은 올라가는 것은 올라가요..그래도 내려오는 것은 차 무게 때문에 뭘 감아도 안 되요..
근데 꼭 이런데 차 끌고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더라니까요..'
용가리는 '그러게요...제가 뭐에 씌웠나봐요..'
아..부끄부끄..
우리의 흑기사는 너무도 멋져보였고 내가 가진 것 무엇이라도 다 주고 싶었다.
스님은 우리에게
'참내..니들은 그래서 시골에서 우찌 살래? 그래갖고 시골서 살겄나..쯧쯧..'
우리는 하는 짓이 왜 이럴까..
한시간 넘어 백장암을 내려와 이제 차를 몰고 가려고 하니 사륜구동 넣은 것이 원상복귀가 안 된다.
사륜구동으로는 20킬로 이상 속도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장거리는 갈 수가 없다.
아무리 스위치를 넣고 시동을 다시 걸어 해 봐도 빠지지가 않는다.
이건 또 뭥미?
흑기사가 인월카센타 사장님에게 전화해 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어쨌든 카센타까지 가면서 용가리는 여기저기 전화했다.
사실 우리가 타는 제품(차)은 용가리가 설계에 참여했다.
그래서 지금 문제되는 부분을 설계한 연구소 동료에게 전화까지 했다.
전문 용어가 나오고 뭐라뭐라...
그래도 안된다.
어찌어찌 기어서 카센타까지 갔다.
나는 또 내년 봄이나 되어야 차 가질러 오겠구나..했다.
그런데 카센타 사장님이 보더니 차를 한 대 탕 때리니 사륜구동 작동이 빠졌다.
이건' 우와~'가 아니라 '허~'였다.
역시 박사고 연구소고 뭐 어려운 도식이고 다 필요 없었다. 그냥 한 대 때리니까 됐다.
스님이 또 말씀하신다.
'박사 다 필요 없네. 시골동네 카센타 사장이 최고네. 자네는 그러면서 자동차 만드나?'
그 이후로 용가리는 뭐든 조금만 버벅대면 자동차 만든다는 사람이 그것도 못하나? 이러면서 구박받는다 ㅎㅎㅎ

  스님들이 치워 놓으신 길. 4년 전 악몽이 떠오른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어 백장암에는 그냥 평지라도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스님이 눈 다 치워놓았으니 차가 올라와도 괜찮다는 것이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살살 가 봤더니 정말 눈은 잘 치워져 있었다.
4년 전에는 며칠 간 폭설이 내려 사람의 힘으로 어쩔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상과는 달리 걸어갈 각오까지 했건만 무사히 차를 타고 백장암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스님께 구박도 받지 않았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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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도바람 2013/12/26 12:49

    아무래도 백장암 검은탑 뒤로 보이는 대웅전 풍경이 낯설어서... 너무 낯설어서 찾아 보았답니다.
    내가 기억하는 백장암은... 대숲 뒤에 요사채가 있고, 검은 탑은 홀로 당당히 서 있었거든요.

    • 제비 2013/12/28 17:42

      백장암에는 딱 조기까지밖에 못 가봤시요..

  2. 푸른날 2013/12/31 18:17

    지난 15일 아침, 아들과 함께 간청재를 구경하려다 도저히 못 찾고 백장암에 가려다
    큰 낭패를 당할 뻔 했습니다.
    길이 얼어 있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오다가 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정신이 몽롱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이 얼마나 후회되던지...

    • 제비 2014/01/06 17:49

      15일 쯤에도 길이 안 좋았나 보네요..
      그래도 별 일 없이 무사하셨겠지요?
      저도 한번 호되게 당한 후에는 만용 부리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