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봄이 아니구나...
나무들은 연두빛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황량한 들판에도 파란 것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지난 주말 간청재에 오르며 새삼 느꼈다.
간청재 가는 길...2주 전에도 눈이 내렸고 그 전 주에는 그 길에 쌓인 눈을 허벌나게 치웠었다.
그런데...이제는 사방을 둘러 보아도 연두빛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간청재 마당에 스님이 옮겨 심어 놓으신 매화가 두 개나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렇게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열매를 맺고 또 눈이 내리겠지...
이런 일들이 내가 태어난 이래로 나와 상관 없이 계속 일어났겠지만
내가 이런 것들을 알아채기까지 또, 감동하기까지 반평생(?)쯤 걸렸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고 가슴 벅차하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아침에 출발하면 점심때 도착하여 반나절을 까먹고 시작하는 것이 아까워서 이제는 새벽에 떠난다.
5시에 길을 나섰다.
설님 너도님 그리고 멀리서 오신 친구분과...
오디오와 턴테이블 허접스러운 책들까지 챙기느라 짐이 많았다.
오는 길에 어렵게 따 온 두부집 전화번호를 찾아 혹 두부를 먹을 수 있나 확인하니
마침 두부집 아저씨가 (사실 두부집도 아니다. 두부를 만드는지 뭘 파는지 알 수 없는 집. 아는 사람만 아는 집이다)
결혼식이 있어 두부를 일찍 시작해 3,40분 있으면 두부가 된다고 했다.
우리는 생초로 들어갔다. 이제 곧 따끈한 두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니 한 번 더 두부를 눌러야 하니 잠시 기다리라 하셨다.
두부를 누르는 것은 할머니 때부터 쓰셨다는 수십년 된 돌....
드디어 따끈한 두부를 열개나 손에 넣었다.
간청재 마당에 들어서니 빨간 매화 한 송이가 벌어져 있다. 세상에나....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니 이제 매서운 겨울 기운이 아니라 살랑거리는 봄기운이다.
집이 손바닥 만하니 단 시간에 쓸고 닦고 윈드차임을 내어 건다.
따끈한 두부에 막걸리를 곁들여 아점을 먹는다.
그래도 양심이 있지 낮 12시는 지나야 알콜을 섭취해야 한다는 친구분...
그러나 기상한 지 5시간이나 지났으니 평소대로 한다면 오후 두세시는 족히 된 시간이다.
그러므로 한 잔!!
이 얼마나 막걸리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모습들인가 ...
시간은 오전 10시 쯤 되시겠다. ㅎㅎ
이제는 기분 좋은 오수시간.
만화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처럼 아함~소리내며 기지개를 켠다.
겨울 내 닫혀 있던 누마루 방을 드디어 개방....
누마루 방에 앉아 보는 천왕봉 능선 프레임은 또 다른 맛이다.
너도님과 멀리서 오신 친구분이 바구니 끼고 나가 돌미나리를 한가득 캐 오셨다.
이제 저녁 만찬이다.
너도님이 살뜰하게 준비해 온 재료로 유부초밥을 만들고 미나리 무침을 했다.
양념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았지만 미나리 생 무침은 황홀했다.
그렇게 만찬과 술과 이야기와 좋은 사람들의 좋은 기운으로 밤은 더 빛났다.
아침이다. 게으른 우리들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실컷 뒹굴대다 먹을 사람은 먹고 씻을 사람은 씻고 멍 때리는 사람은 멍 때린다.
날씨가 좋아 목표 한가지를 실천하기로 했다.
옆 골짜기 스님의 청매암 걸어서 방문하기...
실실 길을 나서 집 뒤쪽 둘레길을 따라 스님 토굴로 갔다.
탐나는 마루평상에 앉아 살랑거리는 봄 바람을 맞으며 보살님이 예쁘게 내어 주신 과일을 먹는다.
그 과일을 보니 내가 전에 사과 깎다가 '너 그렇게 깎나..'하는 말씀을 듣고
얼른 껍질을 다 주워먹던 생각이 난다.ㅠㅠ
스님께 차 대접을 받고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막차 타고 올라갈 시간이 다가오자 엉덩이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간청재로 돌아올 때는 둘러 오지 않으니 금방 돌아왔다. 갈 때는 힘들면 차 태워달래자 어쩌자..그랬는데..
이제 첫번째 목표는 완전히 달성한 것이다.
집에 돌아와 늦은 점심(?)을 준비했다.
내가 밥을 앉히고 두부를 굽는 사이 너도님과 그를 위시한 사람들은 또 나물을 하러 갔다.
미나리와 쑥이 한 가득...
어제처럼 생으로 무쳤다. 역시 맛나다!!
저녁에 용가리와 부쳐 먹으라고 미나리와 쑥을 조금 남겨주셨다.
이별주 한 잔에 고소한 두부부침...
6시 10분 막차를 타기 위해 5시 45분 쯤 나선다.
마천에 도착하니 아직 6시...
미나리 쑥 부침개를 위해 마트에서 밀가루를 샀다.
계산하려 보니 용가리가 뭘 들고 온다. 계란이다. 계란쟁이...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는 세 사람이나 떠나보낸다 ㅠㅠ
안녕 안녕 안녕~~
서울로 버스 태워 보내고 간청재에 돌아오니 집이 텅 빈 것 같다.
턴테이블에 엘피를 올렸다. 해 그림자를 보면서 브람스를 들었다...볼륨 높여서...
용가리와 나만의 조촐한 저녁상.
용가리가 달달한 재즈곡을 틀었다.
역시...음악이 있으니 살 것 같다.
용가리에게 한 소리 들었다.
어제 미니오디오와 턴테이블 가져 온 것이 너무 기뻐 신세계 4악장을 엄청 크게 틀었다.
나는 사람들이 그 순간 동작 그만!이 될 줄 알았다.
음악이 주가 될 때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나도 음악을 들을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동작 그만'이다.
그런데 어제는 나 혼자만 동작 그만이었지 사람들은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생각 나는 대로 이야기도 나누어야 하는데 음악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럴 때에는 빠지던가 아님 티 안 나는 배경음악을 깔아야 하는 것인데 너무 나 혼자 취했었다. ㅠㅠ
다음 날 아침 마루 창문을 열고 천왕봉 보면서 마음껏 마음껏 음악을 흡입했다.ㅎㅎ
집도 하늘도 능선도 들판도 나무들도 한번도 같은 풍광을 보여준 적이 없다.
모두 같은 풍광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다음에는 두번째 목표. 도솔암 오르기...무난하게 달성할 것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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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저 햇살 아래에서 누마루방에서 낮잠 한숨 자고 싶어라!
나물도 부럽지만 저 햇살이 더 부럽네요^^
저 누마루에는 햇살과 더불어 온갖 벌레들도 함께 들어오겠지요 ㅎㅎㅎ
저 노랗고 반질한 목재에 세월이 앉고 바래지는 날에도 그렇게 막걸리를 반주삼아 아점을 하고 있으시겠지요? ㅎ...점점 간청재 생활에 물들어가는 듯한 제비님 모습이 보입니다.
아직 들떠서 그렇지 정말 물들어 가려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
제가 다 행복해집니다. 행복만끽하시길....
함께 행복감 느껴주시니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