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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

마지막 출근 2014/12/18

by jebi1009 2018. 12. 26.



용가리가 마지막 출근을 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백수가 된 것이다.
우리집에는 두 명의 백수가 뒹굴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1월 한 달 더 근무할 수 없겠냐고 했지만 거절했단다.
잘 했다고 했다.
25일까지 근무인데 휴가 남은 것을 아낌 없이 써서 오늘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용가리는 며칠 전부터 조금씩 짐을 정리했다.
노트북도 정리하고....
그리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떡이 되어서 들어올 것이다.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중이다..

한 동안은 뒹굴면서 잠을 원 없이 잘 것이다.
그리고는 좀비가 되지 않을까 살짝 불안해 하겠지..
그러다가 시간을 좀 먹는 것 같아 더 불안해 하면서 약속을 만들거나 배울 만한 것을 찾아 등록하겠지...
목공을 배우겠다고 했으니 그렇게 하겠지...
그러다가 점점 밖에 나가는 시간이 귀찮아지고 집안에서의 자기 시간을 만들겠지...
백수 선배로서 예상되는 모습이다.
나도 그랬었다.
처음에는 원 없이 뒹굴거리다가 너무 막 사는 것 같아서 일을 만들어 보람찬 하루를 보내려고 한다.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운다.
나는 그때 거금을 들여 커피 로스팅과 드립을 배웠다.
그리고 커피집을 해 보려는 꿈에 부풀어 시급 4000원 4300원 알바도 꽤 했다.
내가 알던 세계와 달라서 재미도 있고 마치 대단한 경험을 하는 것인양 신나했다.
창업을 하려고 들떠 있을 때 기특하게도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난이구나...즉 돈 갖다 버리려고 하는 것이구나...
게다가 하루 자고 일어나면 생겨나는 커피집에 흥미가 팍 떨어졌다. 그리고는 생각을 접었다.
용가리는 그런다.
'그때 니가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포기했다.
저것은 맘 먹은 것은 해야 하니까 망하더라도 시작해야지 안 그러면 병나지...
가게 차린 돈은 없어질 돈이라 생각해야지...
그렇게 말아먹고 나야 미련이 없지..
그러니 제발 욕심 내서 크게 차리지나 말기를....'
그러다 내가 커피집에 흥미가 없어졌다고 하니까 이게 웬 떡이냐 했단다. 없던 돈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딸아이는 나를 보고는 그런다.
엄마는 심심하지 않아?
보통 딸아이가 돌아오는 시간에 대부분 나는 침대에서 책을 보거나, 책을 보다가 잠이 들거나...
뭐 가끔 오락을 하고 있을 때도 있다.
요즘은 날이 추워서 침대 밑에 전기요를 맘껏 이용한다.
먼저 스위치를 올려 따뜻하게 만든 후 커피 한 잔을 내려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책을 읽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심심하지 않느냐는 딸아이의 질문에
이런 호사를 언제 누려보겠냐며 좋아죽겠다고 하면,
엄마는 참 팔자도 좋다...이런다.
피곤한 몸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기가 나를 보면 내가 얼마나 부러워 보일까..ㅎㅎ
'너 엄마 나이에 이렇게 엄마처럼 팔자가 좋으려면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거야'.
'뭐..엄마는 딱히 열심히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뭐? (헉!어떻게 알았지?) 야 엄마도 수험생이었고 학교 졸업하고는 취직해서 돈도 벌고 할 거 다 했어 야..'
어쨌든 니 말대로 엄마는 팔자가 좋다..부럽지?
덧붙여 너도 엄마를 닮았으니 팔자가 좋을 것이라 덕담(?)을 한다. ㅋ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의 오후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다.
나는 옛날부터 빈 집에 혼자 있는 것을 참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커튼을 치고 어두컴컴하게 해 놓고는 작은 불을 켜고 이불 속에서 책이나 만화책을 보는 것은
내가 가장 즐기는 놀이었다.
직장으로 학교에 다닐 때도 황금 같은 시험 기간에 꼭 하루씩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와 낮잠을 자거나 뒹굴대는 일정을 빼 놓지 않았었다.
그렇게 나 혼자만의 오후 시간이 지나가면 식구들이 돌아온다.
아파트에 장이 서는 날이면 가끔 홍합탕이나 꼬막을 삶아 소주 한 잔하고 기분 좋게 배 두드리며 잔다..
어떤 날은 내가 먹고 싶은 안주가 생기면 오후 일찌감치 준비해서 또 한 잔 한다.
아무것도 없는 날에도 한 잔 한다.
반찬으로 계란찜 하나만 있어도 한 잔 해야지..하면서 소주를 챙겨오는 용가리와 나다.
전 날 떡이 되도록 마시지만 않으면 거의 반주가 일상이다.
예전에는 옴팡 마시는 날이 있으면 한 3,4일은 소주 뚜껑만 봐도 속이 메슥거렸는데 이제는 하루면 말짱하다.
내 몸도 점점 진화(?)하고 있다 ㅎㅎ

딸아이는 아빠도 백수가 된 것에 조금은 불안해 하는 눈치다.
우리는 걱정 말라고...우리는 가진 것이 돈밖에 없으니 너 대학 보내고 다 할 수 있다고 엄청 큰 소리쳤다.
살면서 둘 중 한 사람의 통장에는 항상 꼬박꼬박 돈이 채워졌었는데 이제 그럴 수가 없으니
곶감 빼 먹듯이 빼 먹으며 살아야 한다.
통장에 들어오는 돈 없이 서울에서 지금의 생활을 계속 한다면 출혈이 클 것이다.
그래서...뭐 어쩌라고? 그러면 그런대로 사는 거지 뭐...
딸아이는 자기만 힘들게 산다고 불만이 많다.
자기는 이제 고3이라 빡세고 힘들텐데 엄마 아빠는 늦잠도 자고 얼마나 좋을까...
부러우면 지는거야...약오르지?

이제껏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용가리는 좋던 싫던 의지하고 연결되어 있던 한 줄을 놔 버렸으니 나름 적응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나 역시 결혼하고 아무 목적 없이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2, 3일을 넘지 않았으니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용가리가 적응하는 기간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좋겠고 또 너무 불안하거나 우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나는 너무 걱정도 안 되고 불안하지도 않아서 걱정이다
다 덤벼.............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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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ippy 2014/12/19 00:03

    드뎌 직장이라는 노예생활을 청산하셨군요. 축하드려요. 필요하면 다시 생기기도 하는 것이 일이고 직장이지요. 뭐가 걱정입니까, 그죠? ㅎ...어린 따님만 좀 고민스럽겠네요. 그래도 부모의 행복이 자신의 고통만 아니면 바랄 것이 없는 것, 그게 또 즐거운 인생임을 곧 알겠지요. ^^

    • 제비 2014/12/29 16:32

      축하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이 곳에서는 친한 사람 빼고는 아직 주변에 알리지도 못했어요...
      한창 돈 벌 나이에 무슨 짓이냐..소리 들을 것이 뻔해서요 ㅠㅠ

  2. 무명씨 2014/12/22 09:31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덕이 있었기에 현생에 호사를 누릴 수 있겠지요.
    간청재에서의 안온한 여생을 빕니다.

    • 제비 2014/12/29 16:33

      아이고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맞죠?
      감사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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