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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

선물 2015/11/18

by jebi1009 2018. 12. 27.



입시 준비라는 지리지리하면서도 불꽃 튀는 난리법석이 이제 끝나간다.
수능이 끝나고 이제 하늘에 맡겨야 할 면접이 끝나고 12월 초가 되면 진짜 진짜 다 끝난다.
사실 나는 그냥 지루한 한 해였다. 딸아이는 나름 굴곡이 있었을지 몰라도 나야 언제 끝나나....
내가 한 일은 저녁마다 반주를 곁들인 음주를 하면서 덜렁대는 딸아이가 실수를 했을 때 욕을 한바가지 퍼부어 주는 일밖에...
이제 각각 살림을 따로 차려할 시기가 다가오면서 대기 상태가 끝나가고 있다.
용가리도 직장을 때려친 올 한 해는 정말 대기 상태였다.
공항에서 연착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무료함?
용가리는 무료함 보다는 뒹굴뒹굴의 천국이랄까....

수능이 끝나고 책상 정리를 하면서 끝 없이 쏱아져 나오는 문제집들을 보면서
너 공부 열심히 했구나...용가리와 내가 한 말이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초 중 고 과정에서 딸아이는 고딩 시절이 제일 즐거웠던 것 같다.
입시 준비로 숨 막힐 수 있는 고3 시간도 나름 깔깔대면서 보낼 여지가 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과 나누는 메세지나 대화들을 딸아이의 일상 대화에서 가끔 전해 들을 때 선생님과의 교감이 참 잘 이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입시가 다가왔을 때 말했다.
'정말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어...
나를 위해 마음 써 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그러니까 나는 잘 될 것 같아....'
나 역시 딸아이를 살펴주는 마음들이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딸아이와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20년 간 학교에 있었던 나는 그렇게 마음을 열고 아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뭐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럴 확률은 매우 낮지만 그래도 저렇게 아이들을 받아 주는 모습을 봤을 때 내가 괜히 뿌듯했다.
나는 학교에서 경직되어 있었다. 딸아이의 선생님들처럼 유머러스하지도 않았고 유연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나 소외감을 주지 않기 위해 공평하게 대하는 것에 엄청 신경썼다.
누군가 상처 받을까봐 누구에게는 맘껏 칭찬하고 이뻐해 주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다른 방법으로 다 이뻐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을....내가 많이 모자랐다.
그래도 다시 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쩌면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또 그렇게 깐깐하게 굴었을테니 말이다..
한 아이를 칭찬하거나 상 주기 위해 다른 아이들이 납득하고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 수십가지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나 피곤했다 ㅎㅎ
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내키는 대로 이뻐하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럴 것을...하는 생각도 있다.




그래서 딸아이와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내 방식으로 선물하고 싶었다.
그것은...바로 술!! 와인...
사실 취향을 안다면 소주나 맥주를 보내고 싶기도 했지만 그냥 무난하게 와인....
손편지도 썼다.
아직 모든 결과가 다 나온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오기 전에 선물하고 싶었다.
이렇게 마음 설레는 선물은 오랜만이다....
딸아이 책가방에 넣어 전달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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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퐁 2015/11/19 19:39

    정성스럽네요. 선생님들께서도 좋아하실 듯해요^^

    • 제비 2015/11/30 16:09

      네 좋아하셨대요^^
      다들 술을 좋아하시나 ㅎㅎ

  2. 벨라줌마 2015/11/19 22:37

    저는 사실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크나 큰 고정관념을....오블을 하며 오블지기님들을 통해서 깼답니다. 물론 동시에 내가 학생이던 시설 선생님이셨던 그 분들의 나이가 되었기에 이해가 되는 부분들도 있었구요...... 교사이셨던 제비님의 속사정 이야기를 읽다보니...더 이해가 되네요....세상에 많은 직업...모두 어렵고 힘든 직업이지만...제 개인적으로 교사라는 직업은 정말이지 힘든 군에 속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님께서 고등학교 시절 좋은 스승을 만나 힘이되는 격려와 지지속에 학교생활을 마쳤다니....제 일처럼 기쁜 마음입니다 ^^ 이제 또 다른 사회속으로 집단속으로의 행군에 응원을 보냅니다 ^^

    • 제비 2015/11/30 16:10

      벨라줌마님의 응원 딸아이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3. 게으른꿀벌 2015/11/20 19:01

    친구중에 선생님이 되고 싶어했던 애가 있어요. 전에는 저런 성품이면 아이들과 교감하는 좋은 선생님이 되었을텐데 하며 안타까워했었는데 몇분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되길 잘했다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많은 좋은 선생님들이 가르침이 아닌 다른 환경으로 인해서 학교를 떠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동안 충분히 애쓰셨으니 홀가분히 내려놓으시고... 제비님 앞날에 더 근사한 일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겁니다.

    • 제비 2015/11/30 16:12

      우와~ 근사한 일이라니...감사드립니다 ㅎㅎ

  4. WallytheCat 2015/11/28 07:11

    공평함을 위해 늘 수십가지 고민을 해야했던 제비님의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저도 늘 일 속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 그런 고민을 하거든요. 지금 하는 일은 가르치는 일과는 좀 다르게 누구에게나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점에서, 공평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되니, 자유로워졌다고나 할까요. ^^

    온 가족의 대사인 입시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접어든 모양이네요. 제비님의 정성 가득 담긴 선물을 받으시는 선생님들은 감동 엄청 받으실 것 같아요.

    • 제비 2015/11/30 16:16

      에너지 소비...정말 맞아요...ㅎㅎ

      이제 거사는 끝나고 큰 가닥은 정해졌으니 살살 마무리하고 또 시작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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