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도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집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집 / 박경리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새해 첫날 통영에 다녀왔다.
게으름과 아침잠으로 해돋이는 보지 못하지만
맘껏 게으름 피우다 바다도 보고 회도 먹을 겸 길을 나섰다.
통영은 여기서 가까운 바다라 자주 가는 편이지만 박경리 선생을 보고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념관은 휴일이라 문을 닫았지만 박경리 선생 묘소와 공원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좋았다.
날씨는 반짝거렸고 조용하고 포근한 분위기가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벌써 동백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하늘은 너무도 파란 빛이었다.
박경리 선생 묘소에서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를 한참이나 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아 편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편안하다...'
배추 심고 상추 심고 고추 심고 파 심고...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원고지와 펜에 의지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남겨진 글들을 읽으며
그렇게 그렇게 살아야겠다.
'음풍농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실 2018/01/16 (0) | 2018.12.29 |
---|---|
방문객 2018/01/15 (0) | 2018.12.29 |
크리스마스 선물 2017/12/24 (0) | 2018.12.29 |
일방적인 품앗이 2017/12/16 (0) | 2018.12.29 |
도라지 2017/12/01 (0) | 2018.12.29 |
아~~좋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편안하다.
이렇게 편안함을 일깨워주시는 제비님 글...고맙습니다.
펴안하게 나이들어가고 나이들어가는 것이 편안하고....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