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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

어제 하고 싶었던 말 2013/04/03

by jebi1009 2018. 12. 25.


어제 저녁 아홉시 삼십분 쯤 대문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며 용가리는 놀라면서 말했다.

'너 미쳤냐?'

아니 귀가하는 마누라를 보며 한다는 소리가...

'당근 밤 열두시 쯤 해벌레 해서 들어와야 하는데 이 초저녁에 귀가하시다니..

너 싸웠지? 아님 혼났지?'

이러는거다.

내가 어느 모임에 가는지 알고 있는 용가리는 이렇게 일찍 들어온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럴만도 했다. 나도 이상하니까..

집에 들어와 씻고 나니 이상하게 속이 허했다. 뭘 좀 먹어야했다.

물론 저녁을 굶거나 못 먹은 것도 아니다.

별로 배도 안고픈데 차가운 냉면을 속을 덜덜 떨어가며 코박고 한 그릇을 비웠고

소주 반병에 한치와 잡다한 마른 안주 감자튀김도 먹었다.
평소 소주 반명만에 끝내는 내가 아닌데 술도 안 땡기고 마지막에 시킨 작은 병맥주도
소주잔으로 두잔밖에 안 마시고 그 피 같은 술을 남기고 돌아왔다.
어쨌든 먹을만큼 먹었으나 뭐라도 먹고 싶었다.
라면을 끓여 먹고 와인을 한 병 따서 계란을 삶고 땅콩, 천하장사 소세지, 초코칩쿠키, 게맛살,
엄마가 갖다준 멸치볶음과 오징어채볶음도 먹고 김도 먹고 오렌지도 까먹고...
꾸역꾸역 짜부될 때까지 먹고 잤다.

그냥 어떤 식으로든 한번은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데 그게 잘 안된다.
한 2년 쯤 되었나...그 때부터 내 마음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왜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솔직히 어제의 만남이 살짝 떨렸다(?)
저녁을 먹기로 한 냉면집으로 들어서서 자리로 가는 순간 난 그 선배를 보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평소에는 손을 흔들고 까불면서 반갑게 아는체를 했지만 어제는 나도 모르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는 멀찍이 앉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얼음이 둥둥 뜬 물냉면을 먹으면서 속이 추워 덜덜거렸지만 꾸역꾸역 먹었다.
고개 들고 뭐라고 말을 하거나 눈을 마주치기가 어색해서 그랬다.
다 먹고 맥주집 가서는 좀 괜찮아지겠지...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여느때처럼 다른 것은 없었다. 일상적인 이야기 서로 농담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웃고..
근데 나는 이상했다. 답답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나혼자만 이상한 것 같아 괜히 옆에 앉은 해맑은 ㄴ 을 짖궂게 찔러보기도 하고
장난도 쳤지만 속은 계속 갑갑했다.
여전히 눈을 마주치기가 그랬다...열심히 이야기를 듣는 척도 하고 간간히 고개도 끄덕였지만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않았다. 간간히 선배 입에서 나오는 돈 이야기에 마음만 거슬렸다.
나도 나중에는 주책스러운 이야기도 하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그랬다.

하고 싶은 말을 다 꺼내 놓는 것이 최선은 아니겠지...
나는 때로는 마음에 묻어두는 연습을 좀 해야 한다. 다 까발린다고 좋은 것이 아닌데 그걸 잘 못한다.
여태껏 살면서 항상 홀랑홀랑 다 말하고 다 내보이고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다 내 보이고(오죽했으면 옛날 포카 칠 때 원페어만 들어와도 사람들이 다 알았다)
말하기 좀 거시기한 것도 술 마시고 홀랑 다 말하고..
좀 숨겨도 될 내 깊은 이야기까지 다 말하고
혹은 감추고 싶어하는 상대방 이야기도 다 찔러 말하고..(감추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고)
사실 남의 깊숙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얼마나 부담스러운가..
이런 짓을 나는 여태껏 그 선배에게 해왔던 것이다
그 선배는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인 줄 알고..
그 선배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고 내가 갖지 못한 많은 것을 갖고 있었고
세상사람들이 무시하는 척 하지만 자유로울 수 없는 많은 것들에서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세상의 틀을 깨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이야기도 다 내보이면서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돈을 아주아주 많이 갖고 있으면서 난 돈이 싫더라..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열라 재수없어할 것이다.
근데 그런 종류의 이야기도 그 선배에게는 했다.
선배는 세상사람들과 다르게 돈을 볼 것이라 생각했고 또 그렇게 서로 이야기했으며
돈을 많이 갖고 있는 것과 돈이 싫은 것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주아주 힘들었던,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선배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말하는 나도 힘들었지만 듣는 선배도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선배에게 말했을 것이다.
선배는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고 세상에 별로 무서운 것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마음이 힘들 때 휑하니 선배에게 달려가면 때론 밑반찬도 해 주며 따뜻하게 살펴주었다.
선배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너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독한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지금 내가 연기하고 있는거야..'
그러면 나는 '연기하는 사람 다 죽었나부네 선배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그 선배가 얼마전에 자유선언을 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것이며 어떤 것도 배려하지 않겠다.'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고 또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모임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생각했다.
나혼자 그 선배에 대한 틀을 만들고
선배가 어떻게 이야기하든 내 방식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만들어버렸나보다.
선배는 인생의 롤모델이었고 서로 아름다운 것들을 공감하며 함께 늙어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어떤게 진실이고 어떤게 사실인지...
어쨌든 이제 선배가 가는 길을 조용히 바라보며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선배는 바라봐주길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전공을 몇개를 하든 좁은 원룸에서 밖에 나오지도 않은 채 공부에 매달릴 것이며 또 그것을 해 낼 것이다.
선배는 근성있고 의지가 강하며 명석한 사람이니까...

슬픈 것은 이제 그 모임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술을 남길 정도로..
선배와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가 없다. 슬프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마음의 울렁증 없이 선배를 바라보고 눈을 맞추게 되기를 바란다.
어제 사실 이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할 수가 없었다.
'선배 미안해요 정말정말 미안해요 우리에게까지 그런 자유선언을 하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요
  나 때문인 것 같아요..미안해요...'
조금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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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도바람 2013/04/04 08:13

    혹시 그 선배 나 아니지?
    난 전보다 조금 자유로워진듯하고, 본래 자유로웠으니(?)
    < 지금부터 자유다>라고 선언할 일도 없는듯... 봄일세.
    오늘은 하얀 윗옷에 겨자색 치마를 입고 마음껏 봄 기분을 내고 출근했지.

  2. 뮤즈 2013/04/05 11:56

    슬픈 것은 이제 그 모임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술을 남길 정도로..
    그런데 왜 나는 웃음이 날까요? 툭툭 털고 까잇것 소주나 한 잔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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