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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

갑 중의 갑 2013/03/26

by jebi1009 2018. 12. 25.


엊그제가 딸내미 학교 학부모 회의였다.
퇴직 전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 그러기도 했지만, 안 가는게 샘들 도와주는 것이다..
요런 생각으로 거의 학교에 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학교는 참 거시기하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를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다들 학교에 대해서는 나름의 기억과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학생으로서, 혹은 학부모로서, 아님 선생으로서, 아님 이 모든 것으로서 다양한 시각들을 가지고 있다.
학교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또 전혀 모르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도 쉬운 것 같다...왕년에 학교 문턱 안 넘어 본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보통 자기가 직접 접해보지 못한 생소한 영역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학교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뭐 어쨌든 이제 남는게 시간이니 요 학교에서는 뭐라고 하나 들어볼 겸, 담임샘 분위기 파악도 할 겸
실실 다녀왔다.


  엄마 필요하면 가져.....종이가 남아서 만들었네..이러면서 던져 주었다. 책갈피 하라고...
  단순하게 살아라. 쓸데없는 절차와 일 때문에 얼마나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가? -이드리스 샤흐-
  책갈피에 적어준 말이다.


딸은 요번에 고딩이 되었다. 근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미술을 한다고 해서 예술고에 가게 되었다.
전혀 예상도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냥 집 근처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그냥그냥 평범하게 지 앞가림이나 하며 다니기를 바랬고
또 그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갑자기 그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 전부터 그랬었지만 여자애들이 오밀조밀 만지고 그리고 하는 것을 다들 좋아하니까 그러려니...
그냥 취미 생활로 열심히 해라..그랬다.
딸은 진짜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럼 좋다...어디 해 봐라..니가 생각하는 그림이 입시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당해봐라..요런 생각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제도권에서 미술 공부를 한다는 것이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딸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제도권을 무시하고 그 틀을 박차고 나갈 만큼 그리 끼가 넘치지도 않고
그리 화끈하지도 않은 우리 딸은 지금으로서는 별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예술고에 진학해서 미술대학을 가던가, 아님 인문계고에 가서 미술대학을 가던가..
굳이 대학에 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근데 아직은, 스스로 대학에 가겠다고 하니 어쩔것인가..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우리 딸은 그런 입시미술을 못 견디고 나가 떨어질 것이리라..
근데 내 예상은 빗나갔다. 꼭 예술고에 진학하라고 미술학원에 보낸 것이 아니고 현실을 좀 알라고 보낸 것인데
우리 딸은 그것을 해 냈다.
하루 12시간 이상을 그렸다. 집에서도 그렸다. 학과 공부도 해야 했다.
1월에 시작해서 딱 9개월 동안 그려서 가고 싶은 곳에 갔다.
미술학원에서는 좀 힘들다고 했다. 아동미술도 안 시키셨냐며...
딸은 전혀 학교교육 빼고는 어디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선 그리기부터 시작했다.
게다가 학원에서 빡세게 시키고 구박도 엄청 많이 해서 집에 와서 펑펑 울기도 했다.
그럼 나는 그만 하라고..그거 안 해도 길은 많다며 말렸다.
아이들의 공통점!!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한다.
그래서 기적적으로 어린이대공원 근처에 있는 학교에 갔다.
학원에서는 그림이 부족해서 다 떨어질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일찍 시작한 안정권 아이들이 떨어지고 구박받던 딸내미가 덜컥 붙은거다.
인생은 알 수 없다....쩝쩝..

용가리와 나는 내심 떨어지기를 바랬다.
왜냐면 돈도 많이 들고 지리산으로 가는 날이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딸내미를 잘 꼬셔서 함양으로 데려가 고등학교에 넣으려 했다.
살살 꼬드겼다..거기 가서 미술 공부해도 돼...그리고 지방에서 미술대학 나와서 지역 미술가로 활동하면
얼마나 멋있냐..혹 니가 넘 재능이 넘쳐 유학이라도 간다면 보내줄게..우리랑 내려가자..
딸은 거절했다. 도시에서, 서울에서 살 것이라 했다. 자기도 좀 살아 보고 지리산에 가던지 한다고..
생각해 보니 그렇다.
우리야 다 살아보고 결정한 것이지만 우리는 해 보고 우리 딸은 해보지도 않고 이것이 좋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불쌍한 것은 용가리...3년 간 회사를 더 다녀야 한다. 딸내미 학교 보내느라..
사실 우리의 계획은 딸내미 대학이야 지금 살고 있는 집 팔아서 보내려 했기 때문에
회사 다니며 돈 버는 활동을 그만하려고 했었다. 자식 뒷바라지는 딱 대학까지만..
대학도 우리 딸이 연애를 엄청 잘 해서 결혼 하고 가면 더 장땡일텐데...
대학 가지 말고 시집 가라고 꼬드기기도 했다 ㅋㅋ
근데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즉 100프로 수익자 부담인 학교에 가게 되어서 3년 간 돈을 더 벌어야 한다.
한 발 빠르게 내가 먼저 그만 둔 것이 천만 다행이다. 아님, 내가 더 다녀야 할지도 몰랐다..ㅎㅎㅎ

이야기가 좀 샜다.
어쨌든 처음으로 그런 자리에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다. 중간에 땡땡이치고 싶은 생각이 두어번 있었지만..
3시부터 6시30분까지니까 내가 땡땡이 치고 싶은 생각이 들 만하다.. 그래도 졸면서 잘 참았다.
이런저런거 다 집어치우고 결론은 하나다.
이 세상의 '갑'은 대학이다. 그리고 그 갑 중의 갑은 서울대다.
학생, 학부모, 교사 이 셋중에는 학부모가 갑이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우리 딸이 일반고를 갔다면 오직 학원에서만 그것도 오밤중에 미술활동을 했을텐데
그것보다는 그래도, 그래도 '학교'라는 곳에서 그것도 환한 대낮에 여러가지 미술활동을 하게 된 점이다...
소묘실의 낡은 이젤과 여기 저기 전시된 아이들의 작품과 굴러다니는 실내화를 보면서 잠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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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도바람 2013/03/26 19:42

    갑 중의 갑 노릇을 한번도 몬해봤네. 억울해라.
    아까 빠리 권교사와 뜨개질 싸부 만났는데, 제비 지리산 집 야그 했더니 완전 좋아했다는...
    집에 돈 버는 사람이 자신 하나뿐이라 코 꿰서 다니고 있어 더 부러워했다는...
    난 제비 딸래미가 빠리로 대학에 가서 우리들이 빠리에 놀러갔으면 하는 희망이 있지.

    • 제비 2013/03/29 21:10

      파리든 어디든 알아서 지 갈 길 갔으면...

  2. chippy 2013/03/26 21:40

    생각보다 애들이 제 길을 알아서 잘 찾더라구요. ㅎ...부모의 편의(?)나 이기심에 아랑곳 없이 말입니다. 제가 아는 분의 따님도 미술을 공부하고 학교를 나와 지금은 책 디자인하는 회사를 다녀요. 그림 그리기를 잘하고 좋아했으니 결국 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셈이지요. 그걸 업으로 평생 즐기며 할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인생이겠죠. ^^

    • 제비 2013/03/29 21:10

      업이 되면 즐거움이 사라질 것 같아요 ㅠㅠ

  3. 호박 2013/03/28 16:19

    우리집 큰놈은 인문계 잘 댕기다가 고2때 디자이너 선언을 해버렸는데요.
    재능이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학과공부하기 싫은 이유가 가장 컸다고 믿었는데
    애비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더라고요.ㅠㅠ
    그래도 어딘가 제 실력에 맞춰 들어갔다가 낼모레 군대 간다고 탱자탱자입니다.
    완전 부러운 팔자.

    • 제비 2013/03/29 21:13

      그런 선언을 했다는 자체가 완전 훌률훌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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