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痛飮大快
  • 통음대쾌
심심풀이

메마른 흙먼지와 달콤한 체리 2013/07/05

by jebi1009 2018. 12. 25.



비 오는 날이 좋다.
좋아서 설레기도 한다.
이렇게 촉촉한 날, 메마른 흙먼지 풀풀 날려 마치 화면 밖에까지 그 먼지가 스며나오는 것 같은 영화가 땡겼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향기 Taste of Cherry'
커피 한 잔 내리고 주워 먹을 것 찾아 오고..





주인공 바디는 자동차를 몰고 황량한 벌판을 달려간다.
흙먼지 날리는 공사장도 지나가고...
화면은 자동차 안의 바디 얼굴과 황량한 길과 흙 뿐이다..
바디는 자신의 일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 돈은 많이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하겠다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바디가 선택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바디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얼마를 주겠냐고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키는 일을 하는 인부는 땅을 파라고 하면 땅만 파면 되지 땅을 파서 무엇을 짓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바디가 원하는 일은
바로 자신이 오늘 밤 수면제를 먹고 구덩이에 누웠을 때 내일 아침 자신에게 흙을 덮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주검 위에 흙을 덮어주는 것이 원하는 일이다.
쿠르드족 앳된 군인도, 아프가니스탄 출신인 신학생도 모두 거절하지만 자연사 박물관 박제 일을 하고 있는 노인은
그 일을 수락한다. 아들이 아파서 치료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반드시 약속을 지킬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여전히 화면은 바디의 차 안이다. 차 안에서 바디의 얼굴과 조수석 인물의 얼굴만 보인다...
노인은 차를 돌려 가자고 한다. 좀 돌아가지만 좋은 경치가 있다며...그러면서 말을 시작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바디의 결정을 돌리려는 듯..
노인 자신도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아내는 잠들고 밧줄을 가져 나와 목을 매려 했는데 밧줄이 나무에 걸리지 않더란다.
그래서 나무에 올라가 줄을 단단히 묶는데 손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잡혔다.
그것은 잘 익은 체리였다. 그 체리는 너무 맛있었고 그 체리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잠에서 깨어난 아내와 체리를 함께 먹을 수 있었다.
또 이런 이야기도 한다.
한 터키인이 몸이 너무 아파 의사를 찾아갔다.
머리를 만지면 머리가 아프고 다리를 만지면 다리가 아프고 배를 만지면 배가 아파요..
의사가 말하기를
당신은 손가락이 아픈 것이오...
바디는 노인과 헤어지고는  노인이 말해주고 싶었던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불현듯 강한 삶의 애착을 보이지만
그래도 밤이 되자 수면제를 먹고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그리고 비가 오고..
번개 속에 바디의 얼굴이 한 번 보이고..그리고 화면은 암흑..꽤 오랫동안 암흑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사람 헷갈리게 촬영 모습이 담긴 필름이 나온다.
영화 속 유일한 배경음악인 트럼펫으로 연주한'summertime'이 흘러 나오면서....
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어떤 결론을 내 주리라 기대도 안 했지만 말이다.

바디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바디를 설득하려 했던 노인이 박제사라는 것도 그렇다.
살아 있는 새를 잡아 가슴을 갈라 박제를 만드는...
화면 내내 바디의 차를 타고 덜컹대면서 황량한 곳을 계속 돌아다닌 것 같다.
마흐말바프 감독의 '칠판'을 보면서도 내내 내가 그 칠판 짊어지고 계속 따라 다닌 것 같이 피곤하더니만..
역시 그 지루하고 메마른 느낌..다시 봐도 매력있다.
그런데 왜 이 영화가 이란 정부로부터 상영금지, 출품 금지 처분을 받았을까..
쿠르드, 아프가니스탄, 터키 이런 말만 나와도 안 되남? 아님 이란 노동자들이 너무 후줄근하게 나와서 그런가..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해맑게 본 장면은
바디의 차 바퀴가 길 옆으로 빠졌을 때 근처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차를 밀어주는데
함께 차를 밀던 사람들의 표정이 참으로 해맑았다..노인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내친 김에 '빠드레 빠드로네 Father and Master' 한 편 더 때렸다. 1977년 작이다.
이탈리아 형제 감독인 파올로 타비아니와 비토리오 티비아니가 독학으로 언어학자가 된 '가비노 레다'의 자서전을
소재로 만든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새롭게 느낀 점 두가지.
하나는 양치기에 대한 진실..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양치기나 거짓말 하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에 나오는 그런 달달한 양치기가 아니다.
또 하나는 군대도 때로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구나...
주인공 가비노가 문맹을 벗어나 라틴어 그리스어까지 공부하며 배움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곳이다. 물론 동료의
도움이 있었지만 말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거칠고 메마른 섬 살데니아...가난하고 무지한 부모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산에 올라가 양치는 생활을 하는 이 곳 어린이들..주인공 가비노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몰래 학교에 갔다가 교실로 잡으러 온 아버지를 보고 너무나 겁에 질려 오줌을 싼 채 끌려나간다.
웃어대는 반 아이들을 향해 가비노의 아버지가 소리친다.
'오늘은 가비노가 가지만 내일은 너희들이 갈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아이들은 얼어버린다.
공포 속에 들리는 아이들의 생각들..
'아버지를 죽여주세요..아버지가 당나귀에 차여 죽게 해 주세요'
'난 형이 있으니까 괜찮을거야..10달이나 먼저 난 형이 있는데..난 괜찮을거야..'
'이대로 집에 가서 창가에 탁자를 놓고 뛰어내릴거야..그러면 엄마가 가지 못하게 말려주겠지..'

이 날을 마지막으로 가비노는 산으로 끌려가 무자비한 아버지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며 스무살이 될 때가지
산 속에서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 지낸다.
그러다 축제에 가는 아코디언 연주자의 아코디언 소리가 가비노의 죽어가는 영혼을 깨운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먼저 달려가 길 옆에 앉아 있고, 또 먼저 달려가 앉아 있고...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양 두마리를 죽여 낡은 아코디언과 바꾼다. 그리고는 스스로 상처를 내서 아버지에게
도둑 맞았다고 거짓말한다. 아버지는 치즈와 설탕을 주지 않는 것으로 퉁친다. 소금도 먹지 못하게 한다.

이런 저런 일이 있고.... 여전히 아버지는 자식들을 하녀로 노동자로 돈을 벌어오게 하고
장남인 가비노는 강제로 군에 입대시켜 기술을 배워오게 한다.
스무살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을 차단당하고 두려움과 외로움 폭행 속에서 지낸 가비노는 문맹에 사투리 밖에 할 줄
몰라 군대 생활도 어렵다. 그러나 괜찮은 동료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표준어를 익히고
익히는 것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그리스어 라틴어도 익혀나간다.
모든 시험에 통과하고 전기 기술도 익혔지만 가비노는 대학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어한다.
고향에 돌아온 가비노에게 기다리는 것은 역시 무지하고 탐욕적이기까지한 아버지의 노동착취 뿐이다.

그러나 영혼이 깨어난 가비노는 아버지는 내 주인이 아니고 자신의 삶을 살 것이라며 선언한다.
아버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들을 죽이겠다고 가비노에게 걸어가는데 모짜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흐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가비노가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음악을 끄고 꺼져버리라 소리친다.
그때....가비노는 라디오 볼륨을 더 높인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물 속에 처박는다.
그러자 가비노는 휘파람으로 음악을 계속한다.
난 이 장면이 가장 찡했다.
아버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자신을 때리라 하는데 가비노는 시원하게 아버지 뺨을 때린다.
영화에서 아들이 아버지 뺨을 저렇게 시원스럽게 때리는 것은 처음 본다...
가비노는 본토로 가서 사르디냐 방언 연구로 학위를 받고 언어학자가 된다.

외로운 양치기의 삶,
복종과 명령 밖에 모르는 주인과 농노 관계인 아버지,
억압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젊은이,
아무리 벗어나려해도 돌아가게되는 고향과 자연....

오늘은 영화 두편에서 메마름과 달콤함을 동시에.....아직도 비가 온다....




  1. 美의 女神 2013/07/06 10:39

    글을 읽는 내내 우즈벡의 체리 생각에...
    원없이 먹었던... 어렸을 적 이가 시리도록은 아니지만요...
    비오는 날 때리는(?) 두 편의 영화가 찡하네요. 넘 무겁네요. ^^

    • 제비 2013/07/09 20:09

      우즈벡에서 맛난 과일들 많이 드시고 오셨겠어요^^

  2. huiya 2013/07/06 16:09

    제비님 영화평 좋으네요.
    저는 문학평이나, 예술, 영화평을 읽고 90%이상 이해를 못했거든요.
    제가 한글 난독증이라고 생각을 했었답니다.
    제비님 글은 그런 저를 주늑들지 않게 합니다.

    • 제비 2013/07/09 20:11

      영화평이라니 꼭 뭐 같네요
      그냥 단순 무식하게 주절대니 그런가봐요 ㅎㅎ

  3. 카카오 2013/07/06 18:43

    엇..저 체리향기란 영화, 전에 다른분께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땐 제목을 몰랐었지만요ㅎㅎ. 이렇게 영화감상평을 보고 있으면 그 영화가 보고 싶어져요. 영화보다 영화감상평이 더 재밌다는 느낌이 들때가 많지만요-ㅁ-.

    • 제비 2013/07/09 20:13

      카카오님 반가워요^^

  4. 먹방 2013/07/07 10:47

    저도 제비님의 영화평으로 메마름과 달콤함을 동시에 느끼고 갑니다.^^

    • 제비 2013/07/09 20:16

      전시회 준비로 바쁘시겠어요..
      기대할게요^^

  5. 알퐁 2013/07/09 08:39

    바디는 죽은 후 왜 자기 몸을 흙으로 덮으라고 했을까요?
    결국 그는 체리 맛을 못 본 거네요? 말로만 들었지?

    "화면 내내 바디의 차를 타고 덜컹대면서 황량한 곳을 계속 돌아다닌 것 같다.
    마흐말바프 감독의 '칠판'을 보면서도 내내 내가 그 칠판 짊어지고 계속 따라 다닌 것 같이 피곤하더니만..
    역시 그 지루하고 메마른 느낌..다시 봐도 매력있다. "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 제비 2013/07/09 20:23

      흙을 덮어줄 사람을 찾는 것은 아마도 삶에 대한 애착이겠지요..
      죽으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친듯이 살고 싶은...
      체리 맛을 봤을지 못 봤을지는 알퐁님이 느끼는 대로...
      새벽에 박제사노인이 와서 바디를 불렀을 때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님 원했던 대로 흙을 덮어주었을 수도 있고..
      영화를 보다보면 삶과 죽음에 대한 욕구가 동시에 느껴지거든요
      감독이 우리더러 알아서 하라고 던져버렸어요 ㅎㅎ

    • 알퐁 2013/07/10 08:20

      그러니까말입니다. 자기 몸을 덮을 사람이 아니라 흙을 치워줄 사람을 찾았을 텐데, 두 가지 마음이 오랜 시간 싸운 듯하지만 둘 가운데 하나로 결정을 내버린 것은 그 곳에서 순간 찰나 일어난 힘(? 기?)이랄까 조건이랄까 그게 아닐까요....어떤 기다란 연속선의 결정이라기보다 작은 한 점이 끼친 어마어마한 힘이랄까.... 물론 그 점조차도 그냥 생긴 건 아니고 긴 연속선에서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아이고 뫼비우스띠도 아니고 내참....


'심심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경 2013/08/01   (0) 2018.12.25
꼼지락거리기 2013/07/17   (0) 2018.12.25
이율배반? 표리부동? 2013/07/01   (0) 2018.12.25
붉은 돼지 (紅の豚) 2013/06/14   (0) 2018.12.25
오묘한 조화 2013/04/15   (0) 2018.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