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이 남아 꽃이랑 꽃잎도 떠서 붙였다. 촌스럽나?
거의 20년이 다 된 구정 뜨개실이 나왔다. 어디서? 책상 구석 상자 안에서....
상자 안에는 레이스 뜨는 하얀 구정뜨개실과 바늘, 아이들이 쓴 편지 뭉치, 그리고 사진 한 장...
내가 첫 발령 받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아이들이 쓴 편지 뭉치는 스승의 날이라고 반 아이들이 모두 편지를 써서 상자에 담아 나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참..옛날 아그덜은 순진했다..내용도 참 순진하다..
사진 한 장은 내가 걸스카웃 담당 선생을 하면서 초록색 단복을 입고 걸스카웃 아그덜과 무슨 강당에서
깃발 세워 놓고 찍은 사진이었다. ㅎㅎ
초짜 젊은 선생이 당근 낙점이 되는 자리였으니 나도 방년 24세 때 일년 정도 했었던 것 같다..
잊고 있었는데...
학교 운동장에서 야영한다고 아그덜은 텐트치고 나는 양호실에서 잔 적이 있다.
그때 운동장 텐트 줄에 걸려 넘어져 무릎 다 까지고...
양호실에서 자려고 하니 보이스카웃 아그덜이 창문에 대롱대롱 달라 붙어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었다 ㅎㅎ
그 때는 정말 울고 싶고 집에 가고 싶었다 ㅠㅠ
뜨개실은 첫 발령 받아 간 학교 옆자리 앉은 샘이 특별활동 담당으로 레이스뜨기반을 했었는데
나도 같이 배워두면 좋다고 내 실까지 함께 사서 가르쳐 줬던 것 같다.
꽃병 받침대 같은 것을 뜬 것 같은데 남아 있지는 않다...
실을 버리기도 그렇고 해서 무언가 뜨기로 했다.
용가리가 부르짖는 몸에 두르는 실용성 있는 것을 뜨려고 하다보니 간단한 머플러를 뜨게 되었다.
실은 3타래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양이 꽤 많았다.
어째 됐든 완성했으니 대충 두르고 다녀야겠다 ㅎㅎ
지리산 집 설계를 맡긴 가온건축 소장 부부가 여섯번째 책을 출간했다.
모르고 있었는데 회의하러 갔다가 내일 책이 나와요..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당장 다음날 따끈한 신간을 현찰 주고 샀다.
'사람을 살리는 집'
집 한 번 짓고 나면 책 몇 권 쓸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ㅎㅎ
평소 그 분들이 하시는 이야기 그 분들의 생각이 책에서도 그대로 읽혀진다.
건축가들은 대개 집을 지을 땅에 가면 일단 땅을 둘러보고 동서남북을 재어보고 앞뒤의 물리적 환경을 꼼꼼히 기록하고 그리고 그걸 가지고 분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것을 '대지분석'이라고 하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분석 틀에 걸려들지 않는 무엇이 있습니다.
가령 땅의 의지라고 하는 것인데 어찌 보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인자일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땅에 앉아서 바람도 맞고 햇볕도 쪼이고 그렇게 하면서 땅에게 대화를 청합니다. 물론 땅이 말을 하진 않습니다. 어떤 신통방통한 지관이나 무당이라면 땅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지만 일반인들에겐 그런 능력이 없지요. 그냥 땅에게 꾸준히 말을 걸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그냥 앉아 있다가 땅을 그립니다. 그 자리에서 그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자리에서는 그냥 감각을 열고 느끼기만 하고, 돌아와서 찍어온 사진을 보며 그 땅을 그려봅니다.
<중략>
저는 땅을 그리는 것은 그런 행위라고 생각합니다.<이미지와 개념을 이루는 내용과 만나는 것-앞부분 예시내용>
마치 어떤 경건한 의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의식이 잘 치러지면 땅도 마음을 열고 하나씩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어쩌다 가끔 죽어도 입을 열지 않는 땅이 있기도 합니다만.....
사실 땅을 어떻게 이해하고 땅과 어떻게 타협하느냐가 집을 짓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신중하게 무리수를 두지 말고 정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해야 합니다.
책은
1부 나에게 묻는다
2부 나를 살리는 집
3부 우리를 살리는 집
4부 살리는 집을 그리고 짓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자연과 사람과 삶에 대해 찬찬히 그들의 생각을 들려준다.
사람과 공간에 대해 자각하게 된 중요한 순간을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1989년 초 서대문에 있던 형무소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 텅 비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보기 위해 찾아갔더란다. 모든 문의 빗장이 다 풀어진 형무소 안을 둘러보는데 기분이 묘하고 방금 전까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은 온기도 느껴지더란다. 그리고 놀랍게도 수인들이 갇혀있던 감옥 안에는 그들이 꾸며놓은 다양한 '실내장식'이 가득 했더란다. 어디서 얻은 신문 잡지 같은 데서 살금살금 뜯어내어 자신의 취향대로 꾸며 놓은 감방안...
'아...절망의 끝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더란다.
그때가 그간 학교에서 배웠던 '사람'과 '공간'이라는 피상적이었던 개념에 대해 자각하게 해 주었던 중요한 순간이라고 한다.
4부에서는 최근 설계해 지었거나 짓고 있는 집에 대해 이야기한다.
존경과 행복의 집을 지어달라고 찾아온 건축주와 그 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에는 참 훌륭한 사람들도 많다. 집 짓는데 존경과 행복이라니....
우리는 이런 추상적인 단어에 무지 약한데 여기서 소장 부부는 고심하며 잘 접근해 나간다.
존경이란 강요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나이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높임말을 붙이고 머리를 숙이는 것이 존경은 아닙니다. 존경은 존재에 대한 시선이고 존재에 대한 인정입니다.
저는 존경의 건축을 몇 채 본 적이 잇습니다. 퇴계 이황이 지어놓은 건물들, 퇴계가 만년에 돈이 없어서 삼 년 동안 전전긍긍하며 지어놓고 머물렀던 도산서당과 제자들이 머물던 농운정사 등이 그것입니다. 그 건물들의 관계를 보면, 흔히 그렇듯 높이의 차이로 위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같은 높이의 땅에 집들을 올려놓고 위치와 시선의 변화로 서로를 의식하고 삼가게 하는 그런 건축적인 장치와 입지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저는 그것을 통해 퇴계가 평생 말한 '경敬'이란 단어가 과연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고, 추상적인 단어가 하나의 물질적인 공간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략>
결국 존경이라는 것은 둘 이상의 복수 존재들 간의 경계이며 시선이며 그에 따른 자세입니다.
4부에는 우리 집 이야기도 나온다 ㅎㅎ
[한옥처럼 누마루를 둔 집]
함양에 집을 짓고 싶다며 찾아온 한 부부는 선한 인상에 무척 정중했고 굉장히 성의 있게 질문을 하고 대답에 경청을 했습니다. 덩달아 우리도 흥이 나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고, 만남 자체로도 즐거운 기분이었다고 생각하는 중에 설계를 맡기겠다고 다시연락이 왔습니다.
요 부분에서 용가리와 나는
우리가 정중하고 성의있었냐?
아니..쫄아서 그런거지..
< 중략>
땅이 워낙 크다 보니 어떻게 놓아도 집이 편안하게 앉혀졌습니다. 이런 조건은 시골집을 짓는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무척 어려운 점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적당하고 어울리게 놓일 만한 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생각한 집을 짓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을 위협의 대상이나 극복의 대상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자연을 얼마나 받아들일 것인가를 생각하고, 집과 자연 사이의 적당한 거리와 균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연과 친한 집, 자연에 대비하는 집, 모두 같은 말이지만 뉘앙스가 조금씩은 다릅니다. 이 집은 자연에 살짝 기댄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우리 집은 자연에 살짝 기댄 집이다...너무 맘에 든다.
< 중략>
말하자면 이 집은 전원주택이 아니라 산골주택입니다. 지리산에 있을 뿐 아니라 마을에서도 제일 외곽에 있는 집입니다. 아주 독립적이고 조용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인적이 드물다 보니 여러 가지로 우려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집으로 오르는 길에 아무런 불빛도 없다 보니 태양열을 이용해서 새벽 두 시까지 불을 밝힐 수 있다는 가로등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걱정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일단 우리는 '그곳에 잘 적응하고 사십시오'하는 아주 의례적인 부탁을 드렸습니다. 결국 인간이 적응해야겠지요. 자연에게 잘 부탁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고 매일매일 자연과 친해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기 쉽지 않은 천왕봉을 날마다 보는데 그런 정도의수고를 감수하는 게 뭐 어렵겠습니까?' 하고, 쉽게 이야기했습니다. 다행히 이 집의 주인들은 그것을 수고로 생각하지 않고 기꺼이 자연을 향해 문을 열고, 마음을 열고 살아갈 분들입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땅에게 말을 걸고 그 소리를 들으려 하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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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따!!!
창원 마을에 감리나가야 하는데 시간이 나지않는군요.
여름 휴가때나 가볼까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신가봐요 ^^
이곳에도 몇 년을 집을 지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 시댁은 시아버지와 큰 시숙님이 함께 지은 집이지요. 아예 집 옆에다 살림을 차리고 살면서 노매하매 사는 사람들, 제 성격상 도저히 못할 일입니다만...ㅎ...그런 사람들은 '나 만의 집'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지요. 두 배 정도 돈이 든답니다. 꽤 괜찮은 물 가에(water view) 땅이 나와 있으면 욕심도 나긴 하는데요, 돈 있니? 기술은? 아무래도 자잔한 손재주라도 있어야 즐기면서 하겠지요. 그냥 내가 집에 적응하는 게 편해...합니다.
'자연에 살짝 기댄 집' 부럽슴다. ^^
여기도 손수 집 짓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저는 저런 고생 뭐하러 하냐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당사자들은 굉장히 즐거워하고 뿌듯해 하더라구요
뜨게질 예쁘게 뜨셨네요.
촌스러움도 하나의 멋이랍니다.
편안함을 주지요, 그래서 좋은거라는...
언제나 격려해 주시니 기운이 불끈~
요 부분에서 용가리와 나는
우리가 정중하고 성의있었냐?
아니..쫄아서 그런거지..
아니라고요.... 정중했다고요. ^^
자연에 기댄 집... 지신을 밟으면 안 되것죠? 친하게 지내야쥬. 기대됩니다.
저도 책 주문. ^^
이런 저런 이유로 아직 땅도 못 팠는데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언젠가는 되겠지..천천히 가자..이러면서요 ㅎㅎㅎ
안촌스러움
이뿜니다~
이쁘다고 해 주시니 기분이 으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