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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풍농월

갑자기 여름

by jebi1009 2022. 6. 23.

지난 주말 갑자기 여름이 시작되었다.

6월이 되어서도 날이 덥지 않았고 저녁에는 오히려 스산한 기운이 있어 방에는 군불을 지폈다.

낮에 햇살은 따가웠지만 저녁 기온이 낮아 솜이불을 계속 덮었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이불 홑청을 뜯어 삶아 빨고 솜이불은 넣어두고 차렵이불로 바꾸었는데 

이번에는 솜이불을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여름이 왔다.

햇살은 따가워도 그리 덥지는 않았는데 습도와 함께 기온이 30도를 넘었다.

가을밤과 같은 이전과는 달리 여름밤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날씨 앱을 보니 계속 비 표시가 있어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해가 쨍하게 뜬 아침 전격적으로 이불 홑청을 뜯었다.

삶고 말리고 다림질하고 다시 꿰매고... 아침 시작한 일은 해가 기울 때 끝이 났다.

몸은 힘들지만 까실까실한 요 홑청과 새로 꺼낸 차렵이불이 보람찬 하루를 보상했다.

 

 

여름 문턱 숙제 중 또 하나가 커튼과 가리개, 방석 쿠션의 커버를 바꾸는 일이다.

여름 커튼 등등을 꺼내 다시 다림질해서 걸고 걸었던 것들은 빨아서 또 다림질을 했다.

다림질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누마루 가리개를 떼어내고 누마루 창과 방충망을 닦고 누마루 청소도 했다.

이렇게 해서 여름 체제가 완성되었다.

 

며칠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다.

비가 시작되기 전 감자를 캐려고 했는데 조금 더 두기로 했다.

감자까지는 조금 무리였다. 뒷마당 풀도 뽑지 못했다.

그 사이 대선 이후 널부러져 있다가  딴지에 주문한 장인의 칼 '한국 제일도'가 3개월 만에 도착했고

무명천에 놓던 수도 완성했다.

무명은 기계로 천을 짜지 않고 재래식 베틀로 짜는 것이란다.  그래서 광목과 달리 폭이 좁다.

광목보다 질감이 더 성기고 힘이 있다. 가격도 광목보다 훨씬 비싸다.

예전에 색감과 질감이 예뻐서 사 두었던 것인데

꺼내서 부엌과 안방 사이 가리개를 만들고, 남은 것은 다포를 만들었다.

 

 

딱 2주다. 수경 스님의 전화를 받고 딱 2주 만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냥 세상이 야속했다.

다들 각자의 인연으로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각자의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다른 장례식장과는 달랐다.

우리 아빠는 하루의, 아니 단 일 분의 시간도 주지 않고 가셨는데 스님은 겨우 2주였다.

'서울 따님 주시랍니다.'

영결식에 앞서 마지막 인사드리고 일어서는데 고담 스님께서 건네주셨다.

'혹 따님이 싫다 하시면 보살님이 가지라 하셨습니다.'

 

 

영결식에 참석하지 못한 딸아이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니 '내가 탐내며 만지작거린 건데..' 하면서 그림 이야기를 한다.

딸아이 어릴 때 수월암 놀러 가서 수월암 마당을 그려서 스님께 드린 적이 있다.

그림을 보시더니 '개가 참 용맹스럽네' 하셨다.

사실 수월암에는 개가 없었다. 딸아이가 그림 귀퉁이에 작게 그려 넣은 것이다.

그 그림을 계속 간직할 것이라고 어린 딸아이와 약속하셨다.

물론 수월암과 함께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말했다.

'엄마 아빠가 스님 할아버지를 정말 어른이시라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엄마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엊그제 49재 초재에 다녀왔다.

수경 스님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고담 스님의 얼굴도 다시 뵈니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죽음이 찾아오는 때가 조금은 세상이 지겨워질 때쯤이면 얼마나 좋을까..

계속해서 하늘도 이쁘고 나무도 이쁘고 한 번 더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이렇게 미련과 욕심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오면 어쩌지?

갑자기 들이닥쳐 찰나에 끝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조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잘 정리할 수 있기를..

나도 할 수 있기를....

마당에는 봉암사 동암에서 건너온 루드베키아가 만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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