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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

지리산의 할로윈 2018/11/01

by jebi1009 2018. 12. 29.

'아무도 안 계세요?'

창고에서 커피를 볶고 있는데 누군가의 얼굴이 나타났다. 깜짝이야....

보통은 차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 내다보게 되는데 로스팅하느라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학교 가는 길에 얼굴 보고 가려고 들렀어요~'

이쁜 둥이엄마의 얼굴.....

그리고는 쿠키 봉지를 건넨다.

아....할로윈!!

둥이엄마는 초등 방과후 영어선생님이다.

몇 년 동안 할로윈이 되면 손수 쿠키를 구워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할로윈 행사를 한다.

이번에도 200개가 넘는 쿠키를 구웠다고...그 귀한 쿠키를 나에게도 하사해 주셨다. ㅎㅎㅎ



둥이엄마의 할로윈쿠키



간청재로 내려오기 전에는 할로윈이 그렇게 딱 자리 잡은 행사는 아니었다.

영어유치원과 영어학원을 중심으로 할로윈이 살살 자리 잡더니 이제는 누구나 아는 떠들썩한 행사날이 된 것 같다.

지난 주말 가족행사가 있어 서울에 다녀왔는데 할로윈 행사 용품 판매가 시작되면서 온통 할로윈 분위기였다.

서울 살 때 동네 비싼 영어유치원의 할로윈 행사를 보며 별 유난을 다 떤다며 마뜩지 않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발렌타인데이처럼 자리 잡은 느낌이다.



 이번 서울 나들이 때 쿠키를 사러 갔더니 이렇게 할로윈 티를 팍팍 내서 할로윈인 줄 알았다. 이 집 쿠키를 좋아해서 서울 갈 때 별 일 없으면 항상 가서 사오는 쿠키다. 요즘에는 설님이 간청재 오실 때 특별 찬조를 해 주셔서 넘나 소중하게 먹고 있다. 헤헤헤...



몇 년 전 그렇게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할로윈이 이곳 지리산에 와서는 너무도 귀엽게만 보여지니....ㅎㅎ

그 이유는 바로 둥이엄마 때문이다.

둥이엄마를 보면 옛날 '천사들의 합창'에 나오는 히메나 선생님이 떠오른다.

시골 작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재미있는 영어 동화도 함께 읽고 글쓰기도 하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할로윈 행사도 함께 하고...

올 여름방학에는 혼자 계획 세우고 예산 신청하고 수업 준비해서 영어 쿠킹 클래스도 했다.

나 같은면 예산 주면서 하라고 사정해도 싫다고 할 것 같은 그 엄청난 일을 말이다...

아이들은 졸업하고도 할로윈 행사를 할 때 찾아오기도 하고 또 동생을 데려오는 아이들도 있단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아주 작은 산골 초등학교 방과후 수업은 거리도 멀고 힘들다고 하기에 그럼 그만 두라고 했더니

"그 하루 수업을 가면 아이들이 뛰어 나와 안기면서 '1주일 동안 엘레나만 기다렸어요~' 이러는데 제가 어떻게 그만 두겠어요..." 이런다.


둥이엄마가 다녀간 후 예초기 돌리고 내려온 용가리는

'저런 사람이 선생님도 하고 유치원도 하고 그래야 돼!'

'맞아 내가 저런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 찔린다니까...'

내가 맞장구치며 반성모드로 중얼거린다.

20년 동안의 학교 생활을 정리하고 명퇴를 했을 때 만세를 부른 나와 엄청 비교되는 이쁜 선생님이다.

나는 학교에 있을 때도 가끔 생각했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선생님이 되었을텐데...

그냥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대학까지 갔고 졸업할 때 먹고 살 일을 생각하니 안정적이고 사회적 평판도 나쁘지 않아 많이들 선택했던 선택지를 뽑았고 시험을 봤고 시험에 붙어서 발령을 받고 그래서 그냥 선생님을 했다.

열심히는 했다. 그리고 한때는 잘 될 것 같기도 했다. 여러가지 시도도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니 행복하지는 않았다.

만약...만약에 말이다 내가 실패를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다르게 말하자면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어떤 일을 선택하더라도 벌 수 있는 돈의 액수가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나지 않는 사회였다면

경쟁을 해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해야만 살아가기가 수월해지는 그런 사회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다른 선택지를 뽑지 않았을까....

부모가 닥달하고 경쟁해서 교사 의사 과학자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고 싶어서 관심 있어서 공부하다 보니 교사도 되고 의사도 되고 과학자도 되는 그런 환경이었다면...

그랬다면 지금 남의 자리를 빼앗아 깔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훨씬 줄어들지 않았을까...


얼마 전 딸아이와 했던 통화 내용이 생각난다.


처음 여기 애들은 목표의식도 없고 의욕도 없어 보여서 참 이상했어.

공부 안 해도 먹고 살 일 걱정 없는데 공부는 뭐하러 하고 대학은 뭐하러 오냐?

그런데 또 보면 훌륭한 의사, 과학자, 교수, 예술가...엄청 많잖아...

아무도 안 시키는데 왜 공부해서 그렇게 되는 걸까?

뭔가 튀게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아...경쟁이라는 개념도 잘 없고...

무슨 얘기하다가 옛날 숙제검사하던 때를 말했는데 그러는거야 '숙제를 왜 안 하는데?' 헐....

뭐 개인차가 있겠지만 그냥 숙제는 하는거고 공부도 하는거고 그러다 하기 싫으면 안 하는거고 하고 싶은 공부가 생기면 하는거고...


지금 잠시 스웨덴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는 딸아이의 말이었다.


만들어지지 않고 그냥 되는 것. 그렇게 무엇이 되어도 차별받지 않는 것.

그랬다면 지금 나는 20년 동안 남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찔림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지도....


할로윈으로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이야기가 빠졌네 ^^;;

결론은 우리 이쁜 히메나 선생님 둥이엄마의 쿠키가 엄청 맛있었다는 것이다!! 음하하하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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