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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풍농월

3월, 눈에 갇히다 2015/03/05

by jebi1009 2018. 12. 26.




간청재에서 서울로 올라오려던 3일, 펑펑 내리는 눈에 출발을 포기하고 하루를 더 머물렀다.
포근한 기온에 바람도 없고 그저 하얀 눈만 소복소복....
어릴적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이렇게 행복하고 황홀한 눈 오는 날은 처음인 것 같다.






간청재 내려가는 날도 눈이 살짝 내렸었다.
기본 옵션으로 올라가는 길 한 번 밀어 주고는 올라갔다.
컨디션 난조로 거의 잠으로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하고 마침 함양 장날이라 3월을 맞이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장에 갔다.
철철이 장날에 장 구경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 제철이고 어떤 것을 심어야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장에 가면 알 수 있다.
감나무, 호두나무 등등 묘목 보다는 조금 큰 나무들이 나와 있고
물미역과 톳이 많이 보이고 작은 꽃화분도 나왔다.
표고버섯도 많이 보였다.
우리는 저녁거리로 자반고등어 두 손을 사고, 매번 이용했던 표고버섯 트럭 아저씨에게 버섯 한 바가지를 사고
즉석 생과자 오천원어치를 샀다.
산처럼 쌓아 두고 까고 있는 멍게를 보고는 까 놓은 멍게 한 바가지를 샀다.
고등어를 살까 꽁치를 살까 망설였는데
고등어는 두 손에 오천원, 꽁치는 스무마리에 오천원...
내가 감당하기에 꽁치는 너무 많은 양이라 화들짝 놀라 포기하고 수준에 맞게 자반고등어를 선택했다.


   함양장에 가는 길, 오도재에서 보이는 지리산 능선.

햇살은 눈부시고 기온은 따스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놀기에도 일하기에도 딱 좋은 날씨다.
장에서 돌아와 용가리는 우수관에 쌓인 낙엽과 여러가지 퇴적물을 파내고 정리했다.
나는 화창한 날씨에 괜히 기분이 들떠서 '시다의 꿈'에 도전했다.
미싱사 언니가 없는 틈을 타서 감히 미싱대에 앉았다.
도전 과제는 안방 덧문을 묶어 줄 무명끈을 만드는 것이다.
바람에 덜컥거리지 않게 문을 고정해 주는 방법을 아무리 고안해 보아도 마땅한 방법이 없다.
그래서 무명끈과 작은 고리로 어찌해 보려고 한다.
두번째 재봉틀과 독대를 한다.
처음에는 서로 어색해서 당황하고 재봉틀이 거부해서 밑실이 엉키고...
우여곡절 끝에 무명끈 두 개를 완성했다.
다리미가 없어 손톱으로 꾹꾹 눌러가며 박았다.
에고 에고...하루 해가 넘어가려고 한다...

  

바람이 불면 덧문이 덜컹거려 춤을 춘다. 지금은 노끈과 의자로 임시 고정...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무명끈. 벽에 고리를 달아 무명 끝자락을 묶을 것이다.
   문고리는 장에서 샀지만 나사가 없어서 박지 못했다.  

아궁이 앞에서 자반고등어를 굽고 지난번 둥이네서 얻어온 무로 생채를 하고 손질한 멍게를 담았다.
술 한 잔에 기분 좋아 마루까지 들어온 달 구경하러 나갔다.
보름이 얼마 남지 않아 달이 훤하다.





아침 눈을 뜨니 눈발이 조금씩 날린다.
날도 포근하고 날리는 눈발도 대수롭지 않아 걱정하지 않았다.
이것 저것 정리하며 서울 갈 준비를 하는데 창밖 풍경이 확 달라졌다.
함박눈으로 변해 펑펑펑 내린다.
일기예보에는 12시 전에 눈이 그치거나 그 전에 비로 바뀐다고 나왔다.
일단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눈이 그쳐야 내려가는 길을 밀던지 할 것이 아닌가..
이때부터 슬슬 마음 한 구석에는 가지말까...하는 마음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사실 다음 날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냥 계획이 조금 어긋나는 것..
그런데 참 오래된 습관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 둘 다 직장에서 놓여났는데도 이렇게 하기로 한 것, 계획한 것은
그것을 바꿀 때 그럴 만한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야 마음이 편하다.
12시가 넘어서도 눈은 더 펑펑펑....
이제 서로 말은 안 하지만 안 가는 것으로 거의 기울었다.
우리 가지 말까? 조금 있다가 눈 밀면 갈 수는 있겠다...날이 따뜻하고 눈이 금세 녹는 것 같은데...
그냥 갈까?
서로 상대방이 '나 안 갈래'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용가리는 모르지만 나는 그랬다.
나는 마음을 굳혔다. 안 가기로...



  30분 간격으로 눈이 쌓인다. 이만큼 쌓였을 때, 그래 가지 말자...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눈 구경가기로 했다.
세상은 새하얗고 너무도 조용하다...
이렇게 아름답다니...
간청재 뒤쪽으로 돌아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이렇게 여유롭고 아름답다니..





가운데 보이는 하얀 지붕이 간청재 지붕이다.




눈을 실컷 보고 밟고 다니다 돌아와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 반신욕을 해 보기로 했다.
집을 지을 때 작게 지어서 다목적 공간을 최소한으로 했기 때문에 부엌이나 욕실 등등은 공간이 작다.
작은 욕실에 욕조를 넣을 것인가 고민했는데 그래도 나는 목욕을 너무도 좋아해서 반신욕조를 고집했다.
그래..오늘은 기름 좀 때서 목욕 한 번 해 보자...ㅎㅎ
반신욕은 환상적이었다.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나는 뜨거운 물 속에서 룰루랄라...이 작은 사치에 황홀했다.
알뜰하게 남은 물로 목욕탕도 깨끗이 청소했다.
개운하게 목욕하고 나와서 차를 마셨다. 어설프지만 차 향은 좋았다.








눈이 그치자 지리산이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고 구름이 몰려들기도 하고...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저녁은 어제 함양장에서 샀던 표고버섯으로 대충 전을 부쳤다.
소주 한 잔 주거니 받거니...
뜨끈한 구들방에서 잠이 드는데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아침까지 요란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햇살이 찬란하다. 바람이 분다고 또 하루를 뭉개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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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도바람 2015/03/05 21:50

    난 어렸을때 맨날 저런 겨울 풍경 안에서 살았다는... (왕 잘난척)

    • 제비 2015/03/09 19:53

      특별히 잘난척 허용하겠음~

  2. 먹방지기 2015/03/06 09:18

    오늘은 부러움에 한 줄 남깁니다.^^

    • 제비 2015/03/09 19:53

      잘 계시지요?

  3. 美의 女神 2015/03/06 12:54

    나뭇꾼과 선녀가 생각나죠?
    함양읍에서 버섯농장 하는 분 알아요.
    이 집 버섯 짱인데...

    • 제비 2015/03/09 19:58

      선녀도 계획을 수정하기 힘든 사람이었나봐요.
      마음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돌아가도록 교육 받았으니까...
      날개옷을 보는 순간 주입식 교육이 효과를..
      날개옷 휙 던져 버려도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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