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痛飮大快
  • 통음대쾌
취중진담

사람 사는 세상 2016/05/24

by jebi1009 2018. 12. 27.


       

5월 23일. 봉하에 다녀왔다.

2009년 이후로 봄이면 한 번씩 다녀오곤 했었는데 요 몇 년 간은 가지 않았었다.

딸아이와 봉하 추수 축제에도 함께 참여해 벼도 베어 보고 새끼도 꼬아 보고 나무 목걸이도 만들고.....

딸아이는 봉하 나들이를 학교 체험학습 보고서로 작성해 제출하기도 했었다.

대통령이 봉하로 내려가자 봉하에는 사람들이 몰렸다.

한 번씩 집 밖으로 나와 이야기도 해 주고 사람들도  만나주었었다.

나도 너무 가고 싶었지만 사람들 많은 곳은 너무 힘들어 이 기세가 한 풀 꺾이면 가서 대통령을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았다.

살아 있는 대통령을 만날 일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처음 봉하에 묘역이 만들어졌을 때 그 앞에서 많이 울었었다.

7년이 지났지만 그래도 눈물이 났다.

봉하에는 새로운 것들이 많이 생기기도 했고 있었던 것들은 다시 잘 정비되어 가고 있었다.


사람이 몰리는 것을 피해 다녔지만 이번에는 23일 가려고 마음 먹었다.

조금 서둘러 출발해 오전 10시 정도에 도착했다.

봉하는 아직 한산했고 한적하게 둘러 볼 수 있어 좋았다.

멀리서 일찍 서둘러 온 사람들과 마을 밖 주차장에서부터 함께 걸으며

무언가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괜히 뿌듯했다.









용가리와 나는 각자 한참을 이 곳에 서 있었다.





나꼼수를 비롯 눈에 익은 리본 글씨들이 보였다. 문재인 팬까페도 있었네...



11시가 넘어가자 사람들이 밥을 먹으러 간다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렸다.

우리도 대충 눈치로 발길 닿는 곳으로 가니 벌써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역시 본능이 알아서 먹는 곳으로 인도한 것이리라...ㅎㅎ

나와 용가리는 줄을 서서 밥을 받아들고는 참 많이 놀라고 감사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식사라 그냥 국수 한 그릇, 잘 하면 비빔밥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집에 온 손님을 맞이하듯 떡이며 과일 수육과 정갈한 밑반찬까지...그냥 받아 먹기가 황송했다.

나눠 주시는 분들이 또 어찌나 맛있게 드시라 이야기 해 주시는지...부끄러워서 '감사합니다' 소리가 목구멍에서 간신히 나왔다.

맛있는 된장우거지국에 밥을 잘 먹고 배가 불러 먹지 못한 떡은 잘 싸왔다.

반찬 하나라도 함부로 하기가 미안해서 몽땅 먹었다.








내 집에 오는 손님에게 차려내듯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이렇게 정성스레 준비했다.


물과 함께 커피까지....참 꼼꼼하게도 신경쓰셨다.

2시 추도식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더 많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햇빛은 따가웠고 용가리와 나는 지치기 시작했다.

잠시 그늘에 앉아 쉬는데 마침 그 앞에서 노사모 회원들이 종이모자와 배지와 떡을 나눠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받아갔다.

역시 사람들이 모이니 이 곳에서도 어디서나 볼 수있는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떡을 더 달라는 사람, 떡은 주는데 물은 왜 안 주느냐는 사람, 종이모자를 대여섯 개씩 가져가는 사람....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생수를 보고는 물 내 놓으라는 사람.

봉사자들을 위한 물이라 물은 안 드린다고 해도 물 한 병가지고 왜그러냐고 자기 목말라 죽겠다고 계속 달란다.

정말 물 한 병가지고 왜그러냐..몇 걸음만 더 가서 천 원도 안 되는 물 사 마시면 될 일을...진상...

떡 싸 준 작은 종이는 아무데나 버리고 대여섯 개씩 가져간 모자는 어느 구석에 버려져 있다.



노사모 봉사자들이 떡과 모자를 나누어 주고 있다.


땡볕에서 말 없이 피켓을 들고 있는 청년. 지나가는 사람들의 격려와 위로도 함께 했다.




추도식을 보고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사람들 속에서 많이 지쳤다.

그래도 문재인씨 한 번 보고 싶어 어정어정 서 있는데 그 곳이 마침 새로 옮긴 사저인가 보다.

얼떨결에 권양숙여사와 함께 나오는 문재인씨를 먼 발치서 봤다.

사람들은 박수를 쳐 주고 힘내라고 격려했다. 아..이런 분위기 너무 좋다.

안 모씨가 도착했을 때는사람들 몰리고 소리 지르고 욕하고 또 욕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아이고...

물론 욕하고 싶은 사람 심정 나도 알지만, 나도 속으로 욕 많이 하지만

그냥 투명인간 취급하면 더 좋을텐데 말이다.








추모식장 옆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추모식을 기다리고 있다. 엄마와 아이가 노란 바람개비를 불며 노는 모습이 참 예뻤다. 어린 아이와 함께 온 젊은 엄마들이 많았다.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들도....



사람 사는 세상....그래...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무언가 함께 한다는 뿌듯함, 같은 생각을 한다는 무언의 위로...이런 것도 느꼈지만

사람이 모이면 항상 보이는 무한이기주의도 보이기 마련이다.

봉사자들이 힘들게 준비한 밥을 먹으면서도 왜 막걸리는 안 주냐며 투덜거리기도 하고

떡은 주면서 물은 안 준다고 떼를 쓰고,

행사 진행을 위해 한 걸음 뒤로 나가라는 젊은 경관의 말에 꼼짝도 안 하고 버티며 도리어 욕을 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땀 뻘뻘 흘리면서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안내해 주는 사람도 있고

세월호 피켓을 든 청년에게 음료수와 먹을 것을 사서 슬며시 건네 주는 사람도 있고...

봉하마을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아무리 땅을 잘 만들어 꽃씨를 뿌려도 꽃들만 올라오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씨 뿌린 적 없는 잡초도 함께 올라온다.

꽃들은 또 내가 뿌린 곳에서만 피지도 않는다. 내가 정해 놓은 구역을 벗어나 엉뚱한 곳에 가서 피기도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만든 한 평도 안 되는 조그만 꽃밭과 다를 것이 없다...












봉하에서 가져 온 기념품들이다. 티셔츠도 사고 앞치마도 샀다.

결혼 할 때, 신혼 때 사람들이 해 준 앞치마를 이사 오면서 별로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몽땅 버리고 왔는데

사람 사는 세상 앞치마를 샀다. 김치 썰 때 입어야겠다. 맨날 옷에 김칫국물 튀었다고 툴툴대지 말고..ㅎㅎ

냉장고 자석도 우리집 냉장고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봉하 막걸리!  좋은 재료를 써서 깔끔하고 목넘김도 좋지만 너무 단 것이 흠이다.

예전에 먹었을 때는 그리 단 줄 몰랐는데 단 맛을 더 강화했나 아님 내 입맛이 변했나....

지금의 반 정도로만 단 맛을 줄여도 충분할텐데...아쉽...


기울어가는 해에 비친 천왕봉을 보며 뽀얀 봉하 막걸리를 잔에 부었다.

그리고 봉하에서 싸 가지고 온 떡과 함께 먹었다.

이제 오월도 다 가고 있다....찬란한 슬픔의 오월이....

top
  1. WallytheCat 2016/05/24 23:40

    세월 참... 벌써 7주년이나 되었군요.
    노오란 텐트도, 그 아래서 자원 봉사하시는 분들도 인상적입니다.
    덕분에 잠시 제가 가장 좋아하던 대통령을 생각하며 눈물 몇 방울... ㅜㅜ

    • 제비 2016/05/27 08:36

      그러게요...ㅠㅠ


'취중진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려운 질문 2016/11/10   (0) 2018.12.28
케잌을 먹다 2016/05/27   (0) 2018.12.27
비 오는 날 2016/05/04   (0) 2018.12.27
끈 떨어진 연 2016/04/30  (0) 2018.12.27
흔적 2016/04/28   (0) 2018.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