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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풍농월

첫 수확

by jebi1009 2019. 4. 19.

엄밀히 따지면 수확이라고 해야 할지....

그저 자연의 섭리로 일어난 일을 내가 살짝 가로채기 하는 것 같다.

욕심 내지 않으면 이 곳에서는 그저 감사할 일들 뿐이다.

간청재는 지대가 높아 며칠 전까지도 황량한 겨울 냄새가 가시지 않았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연두빛이 돌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올라온 부추들....

물론 내 눈에 그렇다는 말이다.

봄이면 마을 어른들은 산으로 들로 봄에만 맛 볼 수 있는 먹거리들을 찾아 거두지만 내 눈은 아직 그런 것들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그저 우리 마당에서 올라오는 부추잎을 반갑게 맞이할 뿐이다.

얼떨결에 거두게 된 고사리도 그렇다.

땅을 살 때 위 쪽 끝에 오래된 작은 고사리밭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풀들로 뒤덮여 거의 야생 고사리나 다름없지만 풀 속에서 부지런히 찾으면 양쪽 어머니들께 보내드릴 만한 양은 거둘 수 있다.

작년부터는 제법 자란 엄나무에서 순을 따 먹기 시작했다.

두릅이나 엄나무순을 먹게 된 것도 신기한데 나무에서 직접 따서 먹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첫 고사리를 꺾었고, 첫 부추를 잘랐고, 엄나무순을 땄다.

입이 헤벌레 벌어지게 부자가 된 기분이다.










싱그러운 먹거리들이 눈에 들어오는 속도와 견줄 수 없을 만큼의 빠른 속도로 잡초들도 그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나름 정리한다고 해 놓은 아래 땅은 벌써 얼마 지나지 않아 정글처럼 변할 조짐이 보인다.

한 번 싹 뽑은 마당과 텃밭에도 새롭게, 더 무성하고 기운차게 풀들이 올라온다.

풀과의 밀당이 시작될 것이다.

투덜거리기도 하고, 짜증도 내고, 포기도 하고, 전투력을 상승시키기도 하고,

그러다가 너희들도 이 땅에 온 소명이 있을텐데...하면서 측은해하기도 하고....







벼르고 별렀던 이불 빨래를 했다.

날씨가 중요했다.

이불 호청이야 좀 흐린 날이라도 말려서 다림질하면 괜찮지만 이불 솜은 햇빛이 좋은 날 일광욕을 확실하게 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호청을 뜯어 빨아 말리고 다시 꿰매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런데....마지막에 그만 '옥에 티'가 생겨버렸다.





이불을 꿰맬 때 아무리 조심을 해도 나는 항상 한 번 이상 바늘에 찔린다.

특히 요는 두꺼워서 더 잘 찔린다.

바늘에 찔리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잘못하여 핏방울이 호청에 묻을까봐 엄청 조심한다.

저번에 작은 핏방울이 묻었는데 지워지지도 않고...하얀 호청에 가시처럼 박혀 엄청 신경쓰였었다.

이번에도 살짝 찔렸는데 거의 피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묻을까 몇 번을 닦고 눌러서 확인하고 마저 꿰맸다.

요는 무사히 꿰맸지만 방으로 옮겨 깔아 놓는 순간 으악! 핏방울이 묻고야 말았다.

조금씩 배어 나왔었나보다.

깨끗이 빨아 다림질 해서 하루 종일 꿰맨 하얀 호청에....막판에 이런 변이 있나..ㅠㅠ

그래도 깨끗하고 뽀송한 이불에 들어가 누우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씨앗이 떨어져 싹이 나고....꽃이 피고 잎이 나고....

내가 알던 모르던 돌아가고 있던 자연의 모든 일이 이제는 몸으로 가슴으로 머리로 다가온다.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고.....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참으로 자연스럽고 편안해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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