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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본다는 것

by jebi1009 2020. 5. 8.

보는 일이 많아졌다.

잘 보고 오래 보게 되었다.

싹이 나고 잎들이 변해가고 벌레들이 그 잎들을 먹어가고, 혹 잘못되어 잎이 말라 죽어가는 모습

꽃봉오리가 맺히고 벌어지고 꽃잎이 떨어지고 열매가 맺고 잎이 무성해지고 그 잎들이 말라 떨어지는 모습

개미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과 유리창에 붙어 기어가던 벌레가 미끄러지는 모습과 거미가 줄을 엮는 모습과 새들이 물 마시는 모습

삶아 널어 놓은 고사리가 말라가는 모습과 툇마루에 쌓인 송화가루가 다시 미세하게 날리는 모습까지...


물론 서울에 살 때에도 무척 많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한참 동안, 조용하게, 집중해서 바라본 것들이 무엇이 있었을까?





아주 오랜만에 시집을 샀다.

시는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시집을 산 것이 얼마만인가....


작가 김영하는 시인을 보고 '많이 보고 적게 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시를 읽어 보면 정말 세상을 끈질기게 보고 있다는 느낌이 팍 온다.

 


다리가 저리다


책상다리하고 앉아 책을 보다가

일어나 전화 받으러 가는데


방바닥이 발바닥에 와 닿지 않는다.

꼬집어도 감각이 없다.

몇 시간 책상에 달려 있던 다리를 빼내

몸 일으키고 걷게 하니

내 다리가 정말 마른 나무가 되었나 보다.

각목 같은 다리에 몇 걸음 자극이 가니

갑자기 다리 속에 무수한 바늘이 꽂힌다.

오랫동안 말랐던 목재 속에

살금살금 다시 흘러드는 수액의 감촉.

참을 수 없이 간지럽다.

우그러지고 뒤틀린 핏줄 탱탱하게 펴지는 느낌.

다시 물 흐르기 시작한 다리 속으로

한꺼번에 별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별빛은 바늘구멍.

막혀 깜깜한 하늘 콕콕 뚫어 빛을 낸 자리.


나 걸음마하듯 걸어본다.

빛이 통하느라 절뚝거리는 상쾌한 다리로,

네모난 책상이 된 후

처음으로 수액이 돌아 짜릿한 책상다리로.



분수


물줄기는 빠르고 꼿꼿하게 솟아오르다가

둥글고 넓게 퍼지며 느린 곡선으로 떨어진다


물방울들은 유리 화병처럼 보일 때까지

정확하고 고집스럽게 하나의 동작으로만 움직인다


이미 결정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정해진 힘과 포물선을 한사코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대리석이나 나무처럼 깎고 다듬으면

물도 얼마든지 고정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듯이


습관과 성질을 이용하여 빚으면

물도 딱딱한 유리 화병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듯이



시집에 실린 90여 편의 시 모두가 감탄을 부르며 마음에 콕콕 박힌다.

콕콕 박히는 것이 마음을 흐물거리게도 하고 조금은 아프게도 한다.

오랜만에 정말 시집을 잘 읽었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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