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일이 많아졌다.
잘 보고 오래 보게 되었다.
싹이 나고 잎들이 변해가고 벌레들이 그 잎들을 먹어가고, 혹 잘못되어 잎이 말라 죽어가는 모습
꽃봉오리가 맺히고 벌어지고 꽃잎이 떨어지고 열매가 맺고 잎이 무성해지고 그 잎들이 말라 떨어지는 모습
개미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과 유리창에 붙어 기어가던 벌레가 미끄러지는 모습과 거미가 줄을 엮는 모습과 새들이 물 마시는 모습
삶아 널어 놓은 고사리가 말라가는 모습과 툇마루에 쌓인 송화가루가 다시 미세하게 날리는 모습까지...
물론 서울에 살 때에도 무척 많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한참 동안, 조용하게, 집중해서 바라본 것들이 무엇이 있었을까?
아주 오랜만에 시집을 샀다.
시는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시집을 산 것이 얼마만인가....
작가 김영하는 시인을 보고 '많이 보고 적게 쓰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시를 읽어 보면 정말 세상을 끈질기게 보고 있다는 느낌이 팍 온다.
다리가 저리다
책상다리하고 앉아 책을 보다가
일어나 전화 받으러 가는데
방바닥이 발바닥에 와 닿지 않는다.
꼬집어도 감각이 없다.
몇 시간 책상에 달려 있던 다리를 빼내
몸 일으키고 걷게 하니
내 다리가 정말 마른 나무가 되었나 보다.
각목 같은 다리에 몇 걸음 자극이 가니
갑자기 다리 속에 무수한 바늘이 꽂힌다.
오랫동안 말랐던 목재 속에
살금살금 다시 흘러드는 수액의 감촉.
참을 수 없이 간지럽다.
우그러지고 뒤틀린 핏줄 탱탱하게 펴지는 느낌.
다시 물 흐르기 시작한 다리 속으로
한꺼번에 별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별빛은 바늘구멍.
막혀 깜깜한 하늘 콕콕 뚫어 빛을 낸 자리.
나 걸음마하듯 걸어본다.
빛이 통하느라 절뚝거리는 상쾌한 다리로,
네모난 책상이 된 후
처음으로 수액이 돌아 짜릿한 책상다리로.
분수
물줄기는 빠르고 꼿꼿하게 솟아오르다가
둥글고 넓게 퍼지며 느린 곡선으로 떨어진다
물방울들은 유리 화병처럼 보일 때까지
정확하고 고집스럽게 하나의 동작으로만 움직인다
이미 결정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정해진 힘과 포물선을 한사코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대리석이나 나무처럼 깎고 다듬으면
물도 얼마든지 고정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듯이
습관과 성질을 이용하여 빚으면
물도 딱딱한 유리 화병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듯이
시집에 실린 90여 편의 시 모두가 감탄을 부르며 마음에 콕콕 박힌다.
콕콕 박히는 것이 마음을 흐물거리게도 하고 조금은 아프게도 한다.
오랜만에 정말 시집을 잘 읽었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