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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

문이 닫히다

by jebi1009 2022. 8. 6.

스님의 49재가 끝났다.
봉암사 동암은 그대로 있지만 이제 스님은 계시지 않는다.
그저 막연히 봉암사에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마지막으로 동암을 보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눈으로 마음으로 확인했다.
2월, 스님을 모시러 소풍에 들렀을 때 순하디 순한 소풍 강아지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다음 생에서는 이 옷 다 벗어버려라..
무겁게 이 옷을 왜 입고 있어... 다음 생에서는 다 벗고 사람으로 와야지...'
스님을 바라보는 강아지의 그 맑고 착하고 초롱한 눈망울과
따뜻한 웃음을 머금고 강아지를 보며 말씀하시는 스님의 얼굴과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스님과 소풍을 나와서 봉암사 동암으로 갔던 것이 스님과 봉암사에서의 마지막이다.
지난가을 말씀하셨던 책상 앞 커튼을 만들어 들고 갔었다.
다리미도 가져갔고 커튼을 달기 위해 공구함도 챙겨갔지만 스님이 준비하신 대나무가 짧아 커튼은 달지 못하고 다림질만 해서 걸어 두고 왔었다.

이 모습에 커튼이 있어야 하는데
책상도 컴퓨터도 아무것도 없이 커튼만 남았다.


이걸 다 손으로 했네... 하시며 손바느질한 것을 좋아하셨다.
양쪽 끝에 작게 놓은 야생화 수도 좋아하셨다.
책상 앞으로 들어오는 여름 햇빛 때문에 커튼을 말씀하셨기에 여름에 와서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여름에 왔다.
그런데 책상도 없고 텅 빈 방에 커튼만 달랑 걸려있다.
스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소풍 강아지에게는 무거운 옷 벗고 사람으로 돌아오라고 이르시더니 스님은 어디로 가버리셨나....

스님이 내어 주신 마지막 차

함허스님을 좋아하셔서 동암에 걸고 싶어하셨다는 '함허당' 현판을 스님이 떠나시고 난 후 걸게 되었다.
차갑고 꼿꼿해 보이는 봉암사 대웅전에 연관스님 49재 현수막이 걸리게 될 줄은 몰랐다.

우봉당 연관스님 49재
우봉스님은 연관스님의 은사스님이라 하셨다.
은사 스님과 같이 우봉을 자호로 삼으셨다고 했다.
은사 스님은 어리석을 우愚를 쓰셨는데 연관스님은 소우牛 를 써서 호를 삼으셨다고 했다.
우봉당이라는 연관스님의 호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번에 처음 들었다.
수경스님의 말씀을 듣고 가만 생각하니 몇 년 전 천도재를 지낼 때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와 넷째 삼촌의 위패 옆에 은사 우봉당 위패가 있었다.

2016년 3월. 스님 모시고 내가 처음 봉암사 동암에 갔던 날이다. 그 한 달 후 4월, 스님은 동암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루드베키아가 흐드러진 마당과, 댓돌에 놓인 스님 신발과, 나무 마루와 미닫이 문과, 무심하게 맞아주던 목소리와, 내심 반가워하는 표정과, 숨 쉬듯 자연스레 끓여주던 차와, 흘러넘치는 찻물과, 찻잔 씻던 작은 집게와, 장 위에 놓인 작은 불상 조각과, 항상 해주던 흥미롭고 소소한 이야기들......(딸아이의 메시지 중에서)

2017년 7월. 딸아이가 찍은 사진들


비가 내려 천막을 두드리니 빗소리만 들리고 법당 안에서 재를 지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러다가 해가 났다.
다시 비가 흩뿌렸다.
마지막으로 꽃을 놓고 자복 방석에 엎드렸다.
이제 끝났다.
그리고 나의 작은 문 하나도 닫혔다.

생각해 보니 스님은 나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문이었다.
그 문을 통해 나는 다른 세상을 봤고 다른 세상을 꿈꿨다.
그 문을 통해 보는 것이 좋았다.

스님이 만나는 사람들, 스님이 바라보는 작은 것들... 그런 것을 옆에서 보는 것이 좋았다.
스님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스님 앞에서는 느슨해지지도 않았지만 긴장하지도 않았다.
난 스님이 스님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이 좋았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정말 작은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정말 작은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작은 테두리 안에서 돌고 돌았다.
아마도 스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그 조그만 틀에서 보는 것이 내가 아는 모든 삶의 모습일 것이다.

또한 그 문은 내가 마주한 현실과 다른,
내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과도 다른,
내가 치러내야 하는 현실과도 다른 세상이었다.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삶에서 관계하는 모든 것이 노동인 것 같은 내 삶의 범주에서
그 문은 노동이 아니었다.
이제 그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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