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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아버지의 해방일지

by jebi1009 2022. 9. 18.

참으로 오랜만이다.
소설을 읽은 것도 오랜만이고, 책을 펼쳐 한 번에 다 읽어 버린 것도 오랜만이고,
가슴 뻐근하게 눈물을 흘린 것도 오랜만이다.
주문한 책이 도착했고 포장을 벗기자 초록색 귀여운 표지가 보였다.
으레 그렇듯이 책장을 넘겨 안을 살펴보려 했을 뿐인데
'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로 시작되는 첫 줄을 보고 나서 죽~ 쉬지 않고 단숨에 한 권을 읽어버렸다.


빨치산의 딸로 살아온 '나'(고아리-아버지가 활동한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한 지리산의 '리'를 따서 이름이 되었다.)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평생의 굴레로 잡아 두었던 빨치산 아버지의 여러 모습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구례읍에 있는 장례식장을 중심으로 우리 현대사의 여러 상처들이 펼쳐지지만 너무 진지하지도 무겁지도 비참하지도 않게 보여준다.
서울에서 살면서 읽었다면 조금 달랐을 것 같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내가 사는 곳과 멀지 않은 지명들이 나오니 더 친근하고 더 사실감 있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조금 연상하게 했지만 읽을수록 그 결이 달랐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모이는 사람들을 통한 일화들은 가슴 먹먹하게 슬프고 참혹하지만 질척거리지 않고 코끝 찡하다가 웃게 만든다.
아버지의 지독한 고문 이야기도, 빨치산 동료들이 내장을 쏟으며 죽은 이야기도, 연좌제로 고통받고 상처받은 친척들의 이야기도 다 그렇게 풀어낸다.

고향에 돌아와 초짜 농부로 사는 사회주의자 아버지에게 깔끔한 어머니가 옷 털고 손발 씻으라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알고 봉게 당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니구만.'
'사회주의의 기본은 뭐여?'
속도 없는 어머니, 아는 것 나왔다고 냉큼 알은척을 하고 나섰다.
'그야 유물론이제라.'
'글제! 글먼, 머리는 뒀다 뭣혀! 생각혀봐. 사람은 하나님이 여개 사람이 있어라, 고런 시답잖은 말 한마디 했다고 하늘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먼지로부터 시작됐다 이 말이여. 긍게 자네가 시방 쓸고 담고 악다구니를 허는 것이 다 우리 인간의 시원 아니겄어? 사회주의자는 일상에서부텀 유물론자로 살아야 하는 법이여.'


그리고 매번 손해보고 오지랖 넓은 아버지에게 잔소리하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런 한 마디에 항상 꼬리를 내린다.

'자네 혼차 잘 묵고 잘 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


매번 당하기만 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민중이 그렇지 뭐.'이렇게 비아냥거리면

'사램이 오죽했으면 글겄냐!' 이것이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나중에 작가는 후기에서 그 말을 받아들이고 나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고 말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학교 동창 박선생을 새벽마다 동네 신문 보급소에서 만나면 이렇게 말한다.

'이런 반동 신문을 멀라고 아깐 돈 주고 보는 것이여! 한겨레로 바꽈 이번 기회에. 펭상 교련선상 함시로 민족통일의 방해꾼 노릇을 했으믄 인자라도 철이 나야 헐 것 아니냐!'
'니나 바꽈라. 뽈갱이가 뽈갱이 신문 본다고 소문나면 경을 칠 텡게'

아버지는 신문보급소에서 광고지 끼우는 일을 거들고 공짜 신문 한 부를 받아 왔고 친구 박선생은 조선일보를 구독했다.
매번 투닥거리는 두 노인네에게 '나'는 한 소리 하지만 '그래도 사램은 갸가 젤 낫아야'하는 아버지.
투닥거리는 말투가 너무 웃겼지만 '하염없다'는 말의 의미를 박선생 때문에 나는 다시 마음에 담게 되었다.

혁명보다 노동을 더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1989년에 석방된 비전향장기수인 아버지의 친한 동료도 노동을 힘들어했다.
석방되고 아버지를 찾아온 그가 서울서 자그마한 식당을 해서 먹고 산다는 말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식당은 그의 여자가 하는 것이다.

'자네가 손이 읎어, 발이 읎어? 워쩌자고 민중을 등쳐묵고 산단 말인가! 베룩의 간을 빼묵제 것도 불쌍헌 여성을! 노동을 하란 말이네, 노동을!'
그이가 밥숟가락을 놓고 멀뚱멀뚱 허공을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노동이....노동이....힘들어.'
그때까지 위태위태 잘 참고 있던 나는 노동이 힘들다는 빨치산의 고백에 그만 풉, 웃음을 뿜고 말았다.


딸인 '나'의 흡연 사실에 대한 일도 웃기다.

'넘의 딸이 담배 피우면 못된 년이고, 내 딸이 담배 피우먼 호기심이여? 그거이 바로 소시민의 본질이네! 소시민성 한나 극복 못헌 사램이 무신 헥명을 하겄다는 것이여!'
그때 어머니 나이 환갑을 넘었다. 환갑 넘은 빨갱이들이 자본주의 남한에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극복 운운하는 것인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코미디다.
.....
성냥갑 같은 집에서 성냥에 묻은 인보다 작게 보일 어머니가 소시민을 탈피하지 못한 자신의 과오를 자기비판하고 있을 터였다.


이 책에는 빨치산 하면 떠오르는 비참한 역사적인 일들도 나오지만 여호와의 증인이나 베트남 여성의 이야기도 일화를 통해 나온다.

오거리 슈퍼 손녀와의 이야기.

학교를 때려치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여자아이가 조문을 왔다.
'할배가 그랬어라. 엄마 나라는 전세계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헌다고. 애들은 천날만날 놀리기만 했는디....'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조문실로 들어섰다. 꺼두었던 스위치를 다 올렸다. 환한 조명 속에 아버지 얼굴이 살아났다.
미국과 싸워 지고 반역자가 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미국과 싸워 이긴 베트남 여인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반색을 할 듯도 싶었다.


아버지와 관련된 일들은 책을 읽어가는 내내 때로는 뭉클하고 때로는 정신을 맑게 하고 때로는 서늘하게 만든다.
빨치산의 딸로 살아온 자신이 억울해서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노려보고 그 사진 속 아버지는
'그거사 니 사정이제, 나가 머라고 했간디...' 이렇게 딴청을 피우는 듯하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으며 시간이 흐르고 나면서 이렇게 달라진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울지 못했던 딸은 아버지의 유골을 '죽으면 썩어문드러질 몸땡이 암 디나 뿌리삐라'라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가 살았던, 아버지의 산 밑의 세상에 조금씩 뿌리며 눈물을 흘린다.
어린 시절 하동댁 가게가 있던 자리에 남은 유골을 뿌리며 울었다.
작은 선술집인 하동댁 가게에서 아버지가 하동댁 궁둥이를 두드리는 것을 보고 다섯 살 배기인 '나'는 아버지를 째려보고 끌고 나온다.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코끝이 찡하다가 말고, 가슴이 뻐근하다 말고, 이렇게 읽어가던 나도 이 장면에서 빨치산의 딸과 함께 울었다.

그리고 빨치산의 딸이라는 천형에 가난까지 물려받은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데 빨치산이 입은 세상의 온갖 은혜까지 물려받고 싶지 않아, 그것이 자신의 빚이 될까 봐 덕을 본 누군가의 이름을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던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이렇게 말한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연관스님을 생각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연관스님의 죽음이 그랬다.
연관스님 죽음 앞에 모여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인연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연관스님이 아니라면 서로 스쳐 지나갈 인연의 끄트머리도 없거나 아니면 원수가 되어도 모를 그런 사람들이 하나의 접점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빠의 장례식과 화장터도 생각이 났다.
죽음은...죽음을 통한 기억은 화해와 용서를 통해 적당히 평화로울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을 때처럼, 가슴 뻐근하게 복받쳐 오를 때 피식 웃음이 나오는...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면 좋을 텐데...
나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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