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으로 죽음을 앞둔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어 출간한 책이다.
책을 읽고 생각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필연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죽음은 필연이다.
하지만 죽음은 미래의 일이다. 지금 경험할 수는 없다.
죽음을 제외한 어떤 것도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필연은 없다.
원인 결과 합리성 가능성 위험성 등의 말들로 필연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더 파고들면 '우연'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책에서 보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우연은 '없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과 '있기 어려운 것이 있는 경우'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만났을 때 굳이 피하고 싶지 않고 혹은 아름답게 묘사하고 싶은 '우연'과
살면서 절대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는 '우연'이다.
살면서 절대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는 우연(질병, 사고, 재해 등등)을 마주쳤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 책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선택은 하나밖에 없는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새롭게 생겨나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불확정성과 우연성을 담고 있다.
결국 우리는 때마침 나타났을 뿐인 우연을 마치 만들어진 '일'인 양 선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불확실한 인생이 어떻게 변해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어떤 나를 허용할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며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택함으로써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건 당신이 정했으니까'같은 말로는 선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선택이란 '고르고 결정한' 끝에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택이란 우연을 허용하는 행위다. 그때 우리는 선택에 해당하는 일만 결단하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우연성까지 포함한 일 전체에 대응하는 삶의 방식을 결단하는 것이다.
ㅇㅇ한 사람이니까 ㅁㅁ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ㅁㅁ를 골랐기에 ㅇㅇ한 사람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우연을 받아들일 때야말로 '나'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성립된다.
불운과 불행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여러 가능성 중 한 가지가 일어난 것이 불운이라면 이미 일어난 일을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 두고 의미를 부여한 결과가 불행이라는 것.
두 학자는 편지를 통해서 질문한다.
우연으로 가득 찬 현실에서 내가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연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말이다...
죽음을 앞둔 철학자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규정한 '환자'이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자신에게 찾아온 우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곳에서 또 다른 가능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2019년 7월 6일까지 글을 쓰고 22일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이 출간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평생 공부했던 철학으로 대면하려 했다.
어찌 보면 그 부담스러운 일을 함께 해 준 의료인류학자도 대단한다.
철학자의 언어 사용이 말장난 같다는 평소의 느낌적 느낌(?)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고)
착착 감기고 머리에 쏙쏙 박히는 글은 아니었다는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내가 일본인의 정서나 말투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우연과 선택이라는 것에 대해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죽음의 필연을, 우연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조금은 순조롭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을 읽으니 최인호의 '눈물'도 생각난다.
연관스님이 하셨던 말도 생각난다.
스님은 우연히 찾아온 질병에게 감사하다고 하셨다.
평생 화두였던 죽음에 대해 정말 깊고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단지 이사할 날을 받아둔 것뿐이라고...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내가 여러 번 죽었을 텐데.. 처음 죽는 것도 아닌데...'
책을 읽고 산책을 나갔다.
우리 집 근처에는 무덤이 많다.
무덤가로 가는 외길을 걸었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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