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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풍농월

눈록색의 작은 풀싹

by jebi1009 2024. 2. 8.
일요일 오후, 담요 털러 나가서 양지바른 곳의 모래흙을 가만히 쓸어보았더니 그 속에 벌써 눈록색의 풀싹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봄은 무거운 옷을 벗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던 소시민의 감상이 어쩌다 작은 풀싹에 맞는 이야기가 되었나 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눈록색의 작은 풀싹>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에 언급되는 계절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곳 간청재에 살면서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서울에서는 책 속의 다른 이야기들이 더 많이 생각났었는데 이곳에 살면서는 감옥에서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는 것에 대한 언급이 더 잘 생각이 난다.

 

 

며칠 날씨가 궂고 을씨년스러웠는데 어제부터 해가 반짝거리고 날이 화창해 미뤘던 청소를 했다.

비 오는 날은 어김없이 고양이들의 발자국이 툇마루에 어지럽다.

청소하면서 앞뒤 툇마루와 누마루도 깨끗이 닦았다.

그러면 뭐 하나... 마루를 닦고 돌아서니 발자국 주인공들이 바로 날름 올라앉아 딴청을 피우고 있다.

 

우산을 말리려고 펴 놓았더니 탐색을 끝낸 후 자리 잡고 떠나지 않는다.

 

 

 

커피 가루를 버리려고 화단 쪽으로 갔더니 수선화가 벌써 뾰족뾰족 올라왔다.

미리 올라와서 벌써 노랗게 얼어버린 놈도 있었다.

여기저기 '눈록색의 작은 풀싹'들이 올라왔다.

물론 지금은 작고 예쁜 풀싹이지만 나중에는 나를 괴롭힐 무시무시한 잡초 군단이 될 녀석들이다.

매화나무에도 망울이 맺혔고 2년 전 심었던 목련(아직도 막대기 상태)에도 잎눈이 보인다.

이대로 봄이 쉽게 오지는 않고 어딘가 숨어 있을 한파가 한두 번 앙탈을 부리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봄기운이 느껴진다.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또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봄이 시작된다.

사람의 일생도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인 것처럼 한 해의 사이클은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봄 여름 가을이 모두 겨울을 맞이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시작이 봄.

이대로 봄이 올 것 같아...ㅠㅠ 오히려 겨울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든다.

봄의 시작은 노동의 시작인 것이다.

겨우내 창고에 있던 삽과 호미를 찾아들고 무거운 겨울 옷을 벗어 봄볕에 빨아 널어야 한다.

노동이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구절초 새 잎들이 올라왔다.
표고목에서 버섯 두 개가 피었다.

 

천왕봉에는 아직도 눈이 하얗지만 마당에는 봄 기운이 느껴진다.

 

오늘이 우수. 경칩을 넘기고 나면 헛간에 누운 농구(農具)도 손질하고 봄볕에 겨울 옷가지를 널 때입니다. 그 흔한 엑스란 내의 한 벌 없이 밤중에 찬물 먹으며 겨울을 춥게 사는 사람들 틈새에서 해마다 어머님의 염려로 겨울을 따뜻이 지내는 저는 늘 옆 사람에게 죄송합니다.
봄은 내의와 달라서 옆 사람도 따뜻이 품어줍니다. 저희들이 봄을 기다리는 까닭은 죄송하지 않고 따뜻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우수, 경칩 넘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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