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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각각의 계절

by jebi1009 2024. 4. 18.

 
<각각의 계절>은 7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권여선의 소설집.
언제나 권여선의 글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다.
행복하지도 활기차지도 않지만 그냥 살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기억의 착각, 불통, 소외 등의 문제 속에서 공허한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
 
특히 엄마와 딸의 관계가 눈길을 끈다.
여성 작가의 소설에 많이 등장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
전에는 나와 엄마의 관계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에 덧붙여 나와 내 딸아이의 관계를 생각한다.
소설에는 자애로운 모성을 가진 보편적인 엄마보다는 불편한 관계가 많이 등장한다.
때로는 약하고, 때로는 집요하고, 때로는 매정하고, 때로는 탐욕스러운.... 그런 엄마의 모습. 
 
[실버들 천만사]에 등장하는 모녀 관계.
이혼하여 따로 살고 있는 엄마와 여행하면서 서로의 아픔을 말한다.
그리고 두려워 도망치고 숨으려고만 했던 엄마는 새롭게 딸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기운을 낸다.
이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에너지 있고 희망적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엄마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간다.
그렇게 집을 나가 홀로 살면서 모든 관계, 자신을 이어주고 있는 관계의 실들을 끊어 버리려고 애쓴다.
딸이 제안한 여행에 가서도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한다.
그러나 딸이 겪는 고통을 듣고 다시 끊어 버리려 하는 실들을 더 단단하게 꼬아서 버텨 보기로 마음먹는다.
나는 이 글에서 고바야시 사토미가 출연하는 영화 [수영장]이 떠올랐다.
어느 날 말없이 집 나간 엄마를 만나러 태국의 게스트하우스로 딸이 찾아온다.
영화 [수영장]의 엄마와 [실버들 천만사]의 엄마 모습이 겹쳐진다.
더 나가면 영화 [디 아워스]  '로라'의 모습도 겹쳐진다.
 
이 소설집에는 자식들이 바라보는 각각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유일하게 남성 아들이 주인공인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에서는 끊임없이 전화해서 불만과 하소연을 늘어놓는 어머니가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원수로 여기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주인공은 오빠 때문에 희생당했다고 생각한 동생 오숙에게도 공격받는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박사 논문을 쓰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차라리 자신이 딸이었다면, 모든 걸 희생하고 차별받고 살아온 그런 존재였다면 오숙처럼 무섭게 돌변할 기회라도 있었으련만, 그는 한없이 억울했고 뭔지 모를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어머니를 닮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자신이 오숙처럼 되기를 바라느냐고, 앞으로 자기가 다 포기하고 희생하고 살면 되겠느냐고, 어머니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깜빡이]에서의 딸 혜진이 말한다.

진짜 귀신같은 게, 내가 언제 약간 행복해지고 내가 언제 약간 기분 좋아지는지를 딱 노리고 있다가, 딱 재 뿌리는 시점을 엄마는 귀신같이 아는 것 같아.
......
엄마는 귀신처럼 내가 약간이라도, 효도까지는 아니야 언니, 효도까지는 절대 아니고, 그 뭐야 그냥 불효라도 좀 덜 해보려고 하는 순간에 그 기회를 딱 빼앗는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나한테도 엄마한테도, 아주 평생 이렇게 한없이 불우하고 찌질한 모양일 거라고!

 
나는 혜진이 쏟아 놓은 말에서 흠칫했다.
내가 엄마에게서 느끼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내 딸도 나에 대해서 저런 부분을 느끼고 있을까...
 
이 소설집의 첫 번째 이야기 [사슴벌레식 문답].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의 관계가 엉클어지고 세월이 흐른 후 주인공은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과거를 복기해 본다.
사슴벌레식 문답의 다른 의미가 주인공 인생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런데 방충망도 있는데 도대체 그렇게 커다란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정원의 질문에 주인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득도한 듯 인자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로든 들어와.
그리고 가버렸다. 사슴벌레를 대변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실로 감탄했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의젓한 말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가부좌라도 튼 듯한 점잖은 자세로.

 

어쩌면 나는 사슴벌레식 문답에 대한 심오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말하는 사슴벌레의 대답이 나는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문답 속에는 내가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온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 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나는 주문을 외우듯 다시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돌아간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그리고 마지막 사슴벌레식 문답은 이렇게 끝난다.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

 
인생의 각각의 시기에 사슴벌레식 문답은 다르게 해석된다.
마지막 절망의 해석이 끝은 아닐 것이다.
다시 의젓한 문답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윽박지르는 문답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사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시골 사는 우리들이 항상 하는 말이다.
사슴벌레는 아니지만 지네, 개미가 들어오면
'얘네들은 도대체 어디로 들어오는 걸까?'
'어디로든 들어와'
용가리와 내가 주고받는 이야기다.
하지만 소설에서처럼 이런 여러 의미를 갖고 한 말은 아니었다.ㅎㅎ
 
재미있는 것은 2022년 발표된 이 소설에 '교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슨 법사도 만나고 무슨 포럼에 패널로 가게 될' 주인공 친구가 나온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재미는 전혀 생뚱맞은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시대의 모든 중요한 키워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소설에서 법사 이야기도 대파 이야기도 조국 가족 이야기도 그 외 우리가 2년 간 겪은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도 뜬금없이 튀어나올 것이다. 10.29 참사 이야기도 말이다....
세월호 이야기도 무방비 상태로 책을 읽을 때 갑자기 튀어나와 울컥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소설의 힘이다.
 
작가 권여선은 '우리가 한 생을 살아나려면 한 힘만 필요한 게 아니라 각각의 시절에 맞는 각각의 힘들, 다양한 여러 힘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사계절의 변화가 자연의 단일한 흐름이지만, 계절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다른 힘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인생에서 각각의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20대 30대에 필요했던 힘과 지금 필요한 힘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높이 아름답게]

베르타는 가을 저녁의 찬 기운에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든다.
지금 나도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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