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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 1

by jebi1009 2024. 8. 28.

 
내 영혼을 뒤흔든 41편의 시.

40년 공직생활을 기념하는 뜻으로 40명의 시인들에게 '내 영혼을 뒤흔든 시' 원고청탁을 했다. 중간에 계산 착오로 한 명이 늘었다. 그러면 결혼 41주년 명분을 걸자.(작은 사람은 무슨 소리 듣게 될까 봐 이렇게 끊임없이 구실을 만들어 간다!)

 
엮은이 김종민 교수의 말이다.ㅎㅎ
 
책을 읽으면서 시에 목숨 건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꼈다.
'시'라는 것에 가슴앓이하고 매달리고 너무너무 쓰고 싶고 게다가 너무너무 '잘'쓰고 싶고...

그 후 시(詩),그 목매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를 향해 얼마나 서럽고 뜨겁게 청춘을 불태웠던가?

 
김관용 시인이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강>을 인생의 시로 꼽으며 쓴 글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열망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한편으로는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 원고를 낸 시인들은 '시'와의 인연을 이런저런 사연으로 풀어낸다.
나는 솔직히 시집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시를 향해 가슴앓이했던 일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보니 나도 시를 읽고 가슴이 아프고 울음이 난 적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잊고 지냈던 나의 어떤 모습이 떠올랐다.
한용운, 윤동주, 백석.
역시 이 책에도 이 시인들의 시가 여러번 등장한다.
내가 중학교 때 샀던 첫 시집이 바로 한용운과 윤동주의 시집이었다.
아마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누군가 선물을 해 주었던 것 같다.
'님의 침묵'이라는 시가 유명했지만 나는 '알 수 없어요'와 '비밀'을 읽고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그 시를 쓴 시인이 스님이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스님이 어떻게 이런 시를 썼을까?
중학생이었던 나는 한용운 사진을 보고 그 이력을 보면서 정말 연결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 이라니!!  너무도 슬프고 아름다웠다.

 

 비밀입니까, 비밀이라니요,
 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대하여 비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마는,
 비밀은 야속히도 지켜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비밀은 눈물을 거쳐서 당신의 시각(視覺)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한숨을 거쳐서 당신의 청각(聽覺)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떨리는 가슴을 거쳐서 당신의 촉각(觸覺)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밖의 비밀은 한 조각 붉은 마음이 되어서 당신의 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비밀은 하나 있습니다.
비밀은 소리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비밀 / 한용운>

 
비밀은 소리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가 없다니!!  한숨이 났다.
 
윤동주의 '서시'는 말하지 않아도 가슴이 먹먹한데 나는 '참회록'이 더 슬펐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참회록 / 윤동주>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중학생 '나'는 이 구절이 너무나 슬펐다.
시인의 사진을 보고 그 이력을 보고 이 구절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었다.
함께 그 거울을 닦아 주고 싶었다.
지금도 코끝이 찡하다.
 
조금 나이가 들어 고등학생 시절 '백석'을 알았다.
그 옛날 젊은 영어 교사로서의 멋진 백석의 모습을 보고, 그 시를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
이북 사투리가 많았던 '여우난골족'은 처음 읽고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냥 매력적이었다.
시인처럼 매력적이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은 당연하고 평볌한데 '높고'라니!!
난 이 시를 읽고 난 이후로 외로울 때, 쓸쓸할 때, '높고'라는 말을 생각하며 넘겼다.
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생각났다.
백석의 시는 슬프고 외롭고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눈에 들어온 백석의 시가 있었다.
손택수 시인이 쓴 꼭지를 읽으며 이 시가 마음에 들어왔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느 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집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집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고향 / 백석>

 
마음이 너무도 따뜻해졌다.
어찌 보면 나도 외지에 나와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많이 외로운가 보다.ㅠ
 
새로운 시집을 사거나 읽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예전 내가 좋아했던 시를 찾아보기는 하지만 현재 활동하는 시인들의 시집은 거의 읽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집을 사고 시를 읽고 훌쩍거리던 '나'를 만날 수 있어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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